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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청소노동자 된 피디 “내가 본 게 인생 전부 아니다 깨달아”

등록 2018-12-20 18:54수정 2019-04-25 14:34

【짬】 피디 출신 청소노동자 이명기씨

청소반장을 하는 동안 틈틈이 글을 써 최근 <피디와 청소반장>을 펴낸 이명기 전 엠비시 피디. “같이 일하는 여사님(동료 여성 청소 노동자를 부르는 말)들이 저를 보고 참신하다고 해요. 머리도 깔끔하고 얼굴도 탱탱하다고요. 여사님들이 저랑 대화를 하고 싶어해요. 하하.”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청소반장을 하는 동안 틈틈이 글을 써 최근 <피디와 청소반장>을 펴낸 이명기 전 엠비시 피디. “같이 일하는 여사님(동료 여성 청소 노동자를 부르는 말)들이 저를 보고 참신하다고 해요. 머리도 깔끔하고 얼굴도 탱탱하다고요. 여사님들이 저랑 대화를 하고 싶어해요. 하하.”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피디와 청소반장>(북랩).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청소반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명기(65)씨가 최근 낸 책이다. 그는 2014년 3월부터 청소일을 했다. 지금 일하는 곳은 13번째 청소 직장이다. 첫 일터는 판교의 다음카카오 본사였다. 오후 11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 일해 월 140만 원 가량 받았다. 지금은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일하고 월 172만원 정도 받는다.

그는 재작년 3월 모교인 광주고 21회 동창 카페에 글을 하나 올렸다. “사회에서 느낀 소외감과 단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를 하고 있다.” 2년 동안 꽁꽁 숨겨온 비밀을 친구들에게 “고해성사”한 것이다. 그 뒤로 카페에 자신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청소 일을 시작한 2014년 여름부터 주로 주말에 글을 썼어요. 청소원이라는 걸 잠시나마 잊고 싶었죠. 구립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자료를 복사해 글을 썼어요.” 지난 18일 서울 청담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저자의 말이다.

그는 1978년부터 1996년까지 <문화방송>(MBC) 피디로 일했다. 기자 출신인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입사 동기다. 엠비시에서 <인간시대>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유명인사로 만든 <오변호사 배변호사> 등을 연출했다. 기억에 많이 남는 프로그램은 <청소년음악회>란다. “티브이에서 처음으로 클래식을 고정 편성했어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클래식의 위대함을 깨달았죠. 6개월 하니 그뒤로는 대중음악 프로그램 연출을 못하겠더군요.”

엠비시를 떠나 현대그룹이 만든 케이블 채널(옛 <현대방송>)로 옮길 때 계약금만 1억5천만 원을 받았단다. 왜 전직을? “현대 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여의도를 깜짝 놀라게 만들 킬러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나 기대만큼 케이블 방송은 기를 펴지 못했다. 아이엠에프 위기까지 덮치며 그가 옮긴 직장은 청산 절차를 밟았다. 결국 1999년 안정된 직장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1978년부터 18년간 엠비시 피디
억대 계약금 받고 케이블채널로
직장 청산·사업 실패로 ‘곤경’
이자라도 갚고자 육체노동 도전

청소하며 4년 동안 쓴 글 책으로
“청소반장 인문학 썰전 강의하고파”

이명기씨가 자비 출판한 <피디와 청소반장> 표지. 왜 자비 출판을 했냐고 묻자 “청소일을 하느라 책을 내줄 출판사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고 답했다. “관악도서관에서 빌려 본 <개념어 해석>(애들러 저)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철학이 쉽게 이해되더군요. 3번이나 읽었죠.”
이명기씨가 자비 출판한 <피디와 청소반장> 표지. 왜 자비 출판을 했냐고 묻자 “청소일을 하느라 책을 내줄 출판사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고 답했다. “관악도서관에서 빌려 본 <개념어 해석>(애들러 저)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철학이 쉽게 이해되더군요. 3번이나 읽었죠.”
“실망감으로 가족들은 2000년 캐나다 워털루란 곳으로 독립이민을 떠났어요. 저는 국내에서 이오미디어 프로덕션을 차려 <화제집중> 프로그램을 만들어 엠비시에 공급했죠. 전관예우을 받은 셈이죠.” 4년 뒤 가족을 불러 기러기 생활을 청산했다. 하지만 2006년 다시 곤경에 빠졌다. “제2의 김종학을 꿈꾸며 드라마 제작에 도전했어요. 허황된 꿈을 꾼 거죠. 재원 조달부터 꼬이면서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때 엠비시 외주 제작도 끝났어요.”

설상가상으로 2010년 아내가 큰돈을 들여 강남에 차린 식당이 빚먹는 하마가 됐다. 만 57살 되던 해다. “매달 은행 이자 75만원이라도 갚겠다는 마음으로 육체노동에 나섰어요. 새벽에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는 일을 5개월 가량 했어요. 하루 5만 원을 주더군요.”

청소를 하기 전까지 공사판 노동이나 방송사 영업직으로도 일했단다. 3년 전 식당을 접은 아내도 현재 마트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저축을 하며 살아요. 강남에 있던 집을 팔아 월세를 살고 있지만 빚도 거의 갚았어요. 아들도 케이블 방송 피디입니다.” 구순의 아버지에겐 지금도 아들의 청소일을 비밀로 하고 있단다. “처음엔 방송통신위에서 야간 방송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왜 청소를? “나이가 드니 어디서도 오라고 안 해요. 청소를 하니 좋아요. 야간에 일하면 보는 사람도 없고, 새벽 3시간은 자게 해주더라고요.”

책은 지난 4년 미친 듯이 써온 글 250편 가운데 62편을 고른 것이다. 청소를 하며 겪은 일이나 단상을 비롯해 사회비평 글이나 다윈과 프로이트의 사유를 다룬 글까지 다양하다. “제가 술을 못 마셔요. 대신 책을 꾸준히 읽었죠.”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고난에서 세상살이 이치를 배우는 단계”라고 했다. 수업료가 가장 비싼 수업이라고도 했다. 뭘 배웠을까. “내가 본 게 인생의 전부인 양 생각하지 않은 열린 생각이죠. 엠비시를 다닐 땐 청소원을 독립적 인격체로 보지 못했어요. 다 대졸자만 상대하니 대부분 고교는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청소를 한 뒤로 생각없이 학력을 거론하거나 영어를 쓰다가 (동료 노동자들한테) 혼이 많이 났어요.”

청소노동자 시선에 들어온 사회의 감춰진 진실도 눈에 띈다. 그가 일하는 맥주홀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주는 택시비를 받지 않고 새벽에 집까지 걸어 가길래 이유를 물었단다. “택시비가 월급에 포함되면 국민연금 건강보험료가 더 떼인다고 해요. 월급이 준다고요.” 한 건물관리 용역회사 팀장은 월급이 180만원이다. 그는 매일 아침 사장님 가방을 받아 맨들맨들한 대리석 바닥을 총알처럼 뛴단다. 사장에게 가방을 받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장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비서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사장님의 출근 의전 때문에 넘어지고 구르고 회전문에 헤딩하기 일쑤란다.

경기 광명에 사는 동료 여성 노동자 한 명은 출근을 위해 새벽 3시30분에 일어난단다.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는 “직접 고용하면 임금이나 복지가 좋아지겠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올해 20만원 가량 월급이 올랐으나 대신 같이 일하는 여성 청소노동자가 6명에서 5명으로 줄었단다. “청소를 하면서 좀더 사회비판적이 된 것 같아요. 빈곤의 악순환, 가난의 대물림이 보여요. 고생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는데 대부분 전문대를 가더라고요.”

건강해 청소도 하고 글도 쓰는 자신을 롤모델로 여기는 친구들도 늘고 있단다.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친구도 저를 따라 재작년에 청소일을 했어요. 최근 대기업에서 퇴직한 친구도 저한테 구직 노하우 자문을 받았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청소반장의 인문학 썰전 강의를 하고 싶어요. 교수를 지낸 친구들이 저한테 ‘생활 속 인문학’을 잘 찾아낸다고 칭찬하더군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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