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진보네트워크센터 오병일 대표
“전화 접속으로 통신을 한다면 ‘새롬데이터맨프로’ 등 통신에뮬레이터를 실행시킨 뒤 ‘atdt 01410’이나 ‘01411’로 접속해 ‘참세상’이라고 쳐보자. (중략) 물론 먼저 아이디 신청을 해야 한다. 통신사용료는 부가세를 포함해 월 3300원으로 국내 통신서비스 중에서는 제일 싸다.”
1998년 11월9일치 <한겨레>의 ‘진보 사회단체 정보네트워크 출범’이라는 기사의 일부다. 저 문장을 ‘요즘 사람들’이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기사에 소개된 ‘참세상’이라는 피시통신 서비스는 그때 사회운동에서 가장 혁신적인 플랫폼이었다. 참세상을 운영했던 단체는 바로 그해 11월14일 출범한 ‘진보네트워크센터’다. 진보넷은 지난 22일 뒤늦은 20살 생일 파티를 열고, 오병일 정책활동가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1998년 첫 정보통신 사회운동 연대체
‘노동법 날치기’ 총파업 때 통신지원 계기
피시통신 서비스 플랫폼 ‘참세상’ 운영
최근 창립 기념 잔치…새 대표도 선출 ‘불온통신 통제’ 위헌 결정 등 큰 성과
“4차 산업혁명 ‘개인정보 보호’ 주력”
지난 21일 찾은 서울 천연동 진보넷 사무실은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사무실 입구에는 20년 전 창립 때 캐치프레이즈였던 “사려 깊고 열정적인 당신이 세상을 바꿉니다”가 적힌 포스터가 그대로 붙어 있다.
창립 멤버이기도 한 오 대표는 20년을 회고하며 “지난 20년이 정보인권의 싹을 틔우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는 꽃을 피울 수 있는 진보넷을 만들 것”이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개인정보 빅데이터 상품화, 통신 감시, 생체정보 수집 등 사생활보호 권리를 중점적으로 제기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진보넷은 정보통신(IT)을 통한 사회운동 연대체였다. 피시통신에서 사회운동 관련 게시판을 운영하거나, 정보공유 운동을 했던 활동가들이 ‘통신연대’라는 연대체를 구성해 활동해오다 1998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 반대 총파업 때 ‘총파업 통신지원단’을 꾸려 국제연대 활동을 한 계기로 ‘진보넷’을 탄생시켰다. 오 대표는 “우리도 ‘국가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운동 네트워크’를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았었다”고 했다.
그 뒤 진보넷은 정보인권 문제를 주로 제기하는 사회운동 ‘단체’로 거듭났다. 진보넷이 제기한 정보인권 이슈 가운데 헌법재판소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올 정도로 큰 사회적 파장을 가져온 사례도 여럿이다.
헌재가 직접 뽑은 ‘주요결정 10선’에 꼽히기도 했던 ‘불온통신 헌법소원’(2002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전기통신사업법은 ‘범죄·반국가적 행위 목적이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해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면, 이런 내용에 해당하는지 정부가 판단한 뒤에 사업자에게 글을 삭제하도록 하고, 글을 올린 사람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헌재는 이를 “불온통신의 개념은 너무나 불명확하고 애매해 다양한 의견 간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하여 사회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건전하게 해소할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이유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검열 반대’ 운동을 해왔던 진보넷의 활동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던 인터넷실명제 위헌 결정(2012년)이나, 주민등록번호 변경 청구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주민등록법 헌법불합치(2015년), 노동자·철거민·노점상의 디엔에이(DNA) 채취에 대한 헌법불합치(2018년)도 진보넷 활동의 결과물이다.
지금이야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이 꽤 높은 편이지만, ‘정보인권’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회자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오 대표는 “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학생·학부모의 개인정보가 지나치게 집적돼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벌인 반대투쟁 때만 해도 교육부 관료들은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을 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에서야 ‘정보인권’이라는 개념이 언론에 언급됐던 정도”라고 말했다. 진보넷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노력 덕분에 2005년 헌재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했고, 2011년 개인정보보호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헌법상 권리로 명시한 개헌안을 내놓기도 했다.
20년 동안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정보인권에 대한 큰 변화가 있었던 만큼, 진보넷은 더 빨리 변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정보인권의 문제를 제기할 예정이다. 데이터 경제 활성화를 명목으로 추진되는 ‘개인정보보호법 개정’과 관련해 개인정보 상품화 문제, 막대한 개인정보를 축적하는 플랫폼의 독점 문제, 20년 전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개념이지만 최근 5G 이동통신 상용화를 계기로 주장되는 ‘망중립성 완화’ 움직임에도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오 대표는 “정부는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산업 차원으로만 판단하는데, 사회변화로 인해 상실되는 가치와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며 “정보 주체의 권리보장, 정보·지식의 공유, 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가 잘 지켜질 수 있도록 활동하겠다”고 말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들이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로 센터 사무실에서 창립 20돌을 맞아 자축하고 있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노동법 날치기’ 총파업 때 통신지원 계기
피시통신 서비스 플랫폼 ‘참세상’ 운영
최근 창립 기념 잔치…새 대표도 선출 ‘불온통신 통제’ 위헌 결정 등 큰 성과
“4차 산업혁명 ‘개인정보 보호’ 주력”
1998년 출범 때부터 활동해온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새 대표.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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