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노동

주 72시간 ‘노동지옥’…가락시장 노동자들이 33년째 방치된 이유

등록 2019-04-16 15:10수정 2019-04-16 20:34

하루 평균 13시간 주 72시간 일하는 노동자들
비민주적 구조 아래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지만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는 “관행”이라며 수수방관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이 상자를 나르며 일을 하고 있다.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이 상자를 나르며 일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4시께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장. 서삼기(가명·54)씨가 화물차에서 제주도산 당근이 가득 찬 상자를 내리기 시작했다. 화물차에는 상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당근 상자를 모두 내리자 곧 오이, 감자, 고구마, 호박, 가지 상자가 몰려들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영상 5도 정도의 서늘한 날씨지만, 서씨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그렇게 저녁도 먹지 않고 쉴틈없이 6시간 동안 일한 뒤, 밤 10시부터 배달을 시작했다. 경매가 끝난 물건을 중매인 상회까지 날라야 한다. 서씨는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비옷을 걸쳐 입고 배달을 시작했다. 업무 시간 직전인 오후 3시께 채운 배가 꺼져 배고픔이 몰려왔다. 정신없이 배달하다 보니 다음날 새벽 2시가 됐고, 그제야 취침 지시가 떨어졌다. 이미 퇴근하긴 어려운 시간. 서씨는 시장 안에 있는 대기실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몸을 뉘었다. 10일도 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다만 11일에는 새벽 1시쯤 일을 마쳤고, 집에는 돌아갈 수 있었다. 출근한 지 꼬박 33시간 만이다.

서씨와 같은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이 주 74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들을 사실상 고용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전횡과 서울시의 무관심으로 인해 열악한 노동 현실이 수십 년째 방치되고 있다.

지난해 말 비정규직 없는 송파 행동과 송파유니온 등은 가락시장 노동자 582명의 설문을 받아 ‘가락시장 종사자 노동조건 실태 연구’를 실시했다. 이들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가락시장을 ‘현대판 노동지옥’이라고 불렀다. 실태 연구를 보면, 가락시장 노동자들은 평균 1일 13시간, 주 74시간 일한다. 노동시간이 주 52시간을 초과한다고 응답한 노동자가 80.1%, 60시간을 초과한다고 응답한 노동자가 66.5%였다. ‘휴게시간이 있으나 제대로 쉴 수 없다’고 응답한 사람도 32.8%, ‘휴게시간이 아예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13.7%였다. 반면 ‘별다른 제재 없이 자유롭게 휴게시간 사용 가능’이라고 답한 사람은 10%에 불과했다. 이들은 주 6일 일하고, 연차도 없다. 1주 평균 휴일 수가 1일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86.8%였고, 연차휴가의 경우 ‘없다’고 답한 사람이 84.7%였다. 가락시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월급제 기준 283만 6842원에 불과했다.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노동조합의 전횡을 성토했다.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은 회사에 취직하는 대신 노동조합에 가입해 일자리를 얻는 구조다. 하역 작업의 업무량과 시간 등이 불규칙적으로 이뤄진다는 점 때문에 하역업체가 하역 물량 취급에 필요한 인력을 파악해 하역노조에 요청하고, 하역노조가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할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업체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특수고용 노동자 신분으로 분류되고, 이 때문에 노동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일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본 판례가 있긴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작 하역노조의 사용자성은 인정하지 않아 근로기준법 적용에 대해 실제로 책임지는 주체가 없다.

가락시장에는 한국노총 산하 서경항운노조, 가락항운노조, 서울청과노조 총 3개의 청과물 하역노조가 있다. 이들 하역노조는 하역 작업을 독점하고 하역업체가 인력을 요청하면 조합원을 편성해 현장으로 보낸다. 하역노조가 가락시장 하역업무를 독점할 수 있는 근거는 ‘누구든지 노동부장관의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는 근로자공급사업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직업안정법 제33조다. 이 법에 따라 다른 노조나 인력업체 등도 노동부장관의 허가를 받을 순 있지만, 그럴 경우 하역노조에서 이런저런 방해작업을 해 실제 하역업체와의 계약에 이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하역노조를 통하지 않고선 일을 할 수 없다. 하역업체와 노동조합은 하역비 인상 등을 단체협약 형식으로 협의하지만, 실질적으로 회사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사용자 역할을 한다.

가락시장뿐만 아니라 울산항운노조, 동해항운노조 등 대부분의 하역·항운노조가 이런 식으로 하역업무를 독점하고 있다. 이런 독점적 권한 때문에 이들 노조에선 취업청탁, 권리금 편취 등을 포함해 조합 간부의 갑질이 끊이질 않는다. 실제 강원도 동해시 동해항운노조에선 지난해 12월 노조 간부들이 이런 구조를 이용해 취업청탁 대가로 수천만원의 뒷돈을 받아 노조 간부 2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가락시장 노동자들이 취침을 하는 대기실.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군대 내무반처럼 부대껴 잠을 잔다.
가락시장 노동자들이 취침을 하는 대기실.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군대 내무반처럼 부대껴 잠을 잔다.
문제는 일부 하역노조가 여전히 비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서씨가 속한 가락항운노조는 위원장을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다. 전임 이공신 위원장은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위원장직을 맡았다. 사실상 종신위원장이다. 현임 오연준 위원장도 6년째 위원장을 맡고 있다. 33년 동안 비민주적 지도 체계가 유지된 셈이다. 가락항운노조는 2018년 기준 조합원 수가 446명으로, 서경항운노조(475명)에 이어 2번째로 많고, 전체 조합원 1142명의 40%에 이른다. 가락시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김아무개씨는 “형식적인 선거조차 치러본 적이 없다”며 “수많은 조합원들이 위원장과 그 가족 등으로 구성된 집행부의 갑질에 시달려야 한다”고 토로했다. 서씨도 “노동조합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같은 하역노동자여도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한다”며 “조합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조합원들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역노조는 과거에도 비민주적이고 보수적인 색채가 강했다고 한다. 과거 서경항운노조와 서울청과노조도 위원장 선거를 치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선거로 선출한다. 내부 조합원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라는 게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서씨는 “아직 가락항운노조 조합원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자들에게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라 책임 있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락항운노조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가락항운노조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답변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가락시장을 개설하고 산하기관인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를 통해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가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역업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조와만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관련 민원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들어왔다”며 “하지만 노동조합 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공사는 민원이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에 ‘이런 민원이 들어왔다’고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고용 구조를 바꾸는 등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면서도 “지금까지 해온 관행이라 바꾸기 어렵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