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운동을 이어온 김준희 민주노총 보험설계사지부 한화생명지회장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사무실에서 봉제공으로 대우어패럴에서 일하면서 1980년대 구로동맹파업 쟁의부장 등으로 싸우며 겪은 40년 투쟁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1985년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동 3권을 보장하라”며 힘을 합쳐 파업했던 ‘여공’들이 있었다. 이 싸움은 ‘구로동맹파업’으로 불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지만, 회사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김준희(60)씨는 파업의 시발점이 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에서 교육선전부장과 쟁의부장을 맡았다. 그를 지난 1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전태일이 고발했던 ‘닭장촌’에 여럿이 모여 살면서 잔업과 철야 근무를 반복했다. “그땐 돈 벌어 대학에 가서 사무직되는 게 꿈이었어요. ‘공순이’였으니까.”
꿈은 곧 바뀌었다. 구로공단 대우어패럴로 옮겨 일하던 1984년, 노조 교육 때 본 영화에서 머리를 한 대 치는 듯한 말을 봤다. “여러분의 급여로 왜 여러분이 만든 물건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하느냐”는 말이었다. 김씨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노조 활동에 매진한 까닭이다. 이듬해 6월, 경찰이 임금인상 투쟁을 불법이라며 대우어패럴 위원장 등 노조 간부들을 구속한 사건이 파업으로 이어졌고, 파업 대오에서 앞장섰던 그는 10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일을 깔끔하게 잘한다’는 말을 듣던 김씨가 출소 뒤 다시 봉제노동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구로공단의 한 봉제회사는 입사 한달 만에 그의 노조 활동 이력을 알아채고 해고를 통지했다. 비슷한 일을 몇번 겪었는데, 알고 보니 김씨는 구로공단의 사업주들이 뽑지 않는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성수동으로 자리를 옮겨 취업하고 노동운동도 병행하려 했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회사에서는 일 잘한다고 처음에 반장을 맡았어요. 3개월 만에 관리자들하고도 친해졌거든요. 그런데 휴일에 잔업이 이어져서 따졌더니, ‘이력서를 내라’고 하는 거예요. (전 직장이 적힌) 이력서를 내자마자 바로 잘렸어요.” 그렇게 모두 6번의 해고를 경험했고, 의류업체 샘플실에서 일하다가 외환위기 때 다시 한번 해고를 당했다. 결국 김씨는 가진 돈을 긁어모아 봉제회사를 차렸지만, 사업은 빚만 남은 채 끝나버렸다.
여성 노동운동을 이어온 김준희 민주노총 보험설계사지부 한화생명지회장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사무실에서 봉제공으로 대우어패럴에서 일하면서 1980년대 구로동맹파업 쟁의부장 등으로 싸우던 당시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김씨는 2011년부터 한화생명(옛 대한생명) 보험설계사로 살고 있다. 해고 위험을 피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 과장한테 ‘이 회사는 노동운동했던 사람도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는 ‘일 중독’이라고 스스로 부를 만큼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월급이 입금되어서 좋았지만, 점점 ‘자기착취’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회사의 노골적인 실적 압박에 본인 돈으로 혹은 가족이나 지인 돈으로 보험 실적을 메울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어졌다. 여러 이유를 대며 보험설계사의 몫에서 수수료를 회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수 인증 설계사’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고용직’이라는 꼬리표도 “현대판 노예”로 느꼈다. “회사가 출근했는지 퇴근했는지도 다 체크하는데, 기본급을 안주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얼마나 웃겨요.”
다수가 여성인 보험설계사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10년 동안 그가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남성인 보험사 지점장들은 중년의 여성 보험설계사들을 모은 조회시간에 실적이 모자라면 대놓고 멸시했다. 일부 고객들은 보험설계사에게 ‘계약을 하면 선물을 주느냐’고 묻기도 했다. “1980년대 여공들이 관리자 남성들한테 폭언, 성희롱을 당했거든요. 지금 세월이 이렇게 달라졌는데 여성 노동이 차별받고 감정노동에 시달리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은 여전해요.”
봉제업계를 떠나며 노조 활동에 대한 생각을 접었던 김씨는 결국 최근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리에 다시 섰다. 회사 쪽이 보험설계사의 자회사 이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지급하는 수수료를 삭감했다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이에 지난 1월 한화생명에 민주노총 보험설계사지부 소속 지회가 생겼는데, 김씨가 지회장을 맡았다.
김씨는 지난 3일에도 서울 여의도 한화생명 본사 앞에서 “회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연시키지 말고 협상 자리에 나오라”며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의 급여로 왜 여러분이 만든 물건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하느냐”는 말이 가져다준, 37년 동안의 한결같은 삶이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