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의 모습. 반도체 제조업은 직업성 암 발생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4%.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매년 발생하는 신규 암환자 수 중 ‘직업성 암’ 환자로 추정하는 비율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이 통계와 크게 벗어난 수치가 집계된다. 2018년 기준으로 한해 새롭게 암 진단을 받은 환자 가운데 직업성 암은 0.08% 수준에 그친다. 국내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 발병만 드물 이유가 없으니, 그만큼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보건의료노조 생명홀에서 열린 '우리나라 직업성 암 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를 통해 산재 인정의 현실과 대안을 짚었다. 시민단체 직업성·환경성 암 환자찾기119(직업성암119)와 노웅래·정춘숙(더불어민주당)·강은미(정의당) 의원실이 주최했다.
■ ‘직업성 암’, 한국에서만 적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매년 신규발생 암 환자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하는 것을 참고할 때, 이를 우리나라 매년 신규 암 환자 24만명에 적용하면 국내 직업성 암 환자 규모는 9600명 수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이러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우리나라에서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는 환자는 200여명”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직업성 암 산재 승인 건수를 보면, 2015년 83건, 2016년 113건, 2017년 178건, 2018년 205건 등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인데도, 여전히 신규 암환자의 0.0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소장은 산재 사망자 비율로 집계해도 한국에서 인정되는 직업성 암은 극히 드물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2017년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는 전세계에서 산업재해로 연간 273만명이 사망하는데, 전체 사망자의 26%가 직업성 암으로 숨진 것으로 집계했다. 국제산업보건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주카 타칼라가 2014년에 연구한 결과를 보면, 유럽은 산재 사망자 중 직업성 암이 원인이었던 경우가 53%에 달했다. 반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산재 사망자 가운데 직업성 암으로 인정된 경우는 6%(125명)에 불과해, 유럽과 세계 통계에 견주면 크게 낮은 수준이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 발제 자료 갈무리
■ 국내 직업성 암, 어느 직종에서 나타나고 있나
국내에서 직업성 암은 다양한 직군에서 나타나고 있다. 직업성암119를 통해 지난해부터 이날까지 직업성 암으로 산재를 신청한 21명에 대한 자료를 보면, 제철소에서 30여년 간 근무하다 폐암·루게릭병·폐섬유증 등을 앓는 이가 13명이었다. 또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3디(D) 프린터 프린팅 작업을 한 교사 3명은 육종암 진단을 받았다. 전기원으로 일했던 노동자 3명은 각각 폐암·뇌종양·백혈병을 앓고 있다. 주얼리 가공을 했던 한 노동자는 백혈병 발병으로, 플랜트 건설업계에서 일하다 세포림프종 진단을 받아 산재 신청을 했다. 반도체 등 전자제품 제조업의 직업성 암 발병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집계를 보면, 현재까지 백혈병 등 직업병으로 156명이 산재신청을 해 70명이 산재를 인정받았는데, 여기엔 암 뿐만 아니라 중증 질환으로 인정받은 사례까지 포함됐다.
2019년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연구원의 ‘직업성 암 요양결정 사례 및 판례분석 연구’(김경하) 분석을 보면, 2015년에서 2018년까지 직업성 암 산재 신청 비중은 제조업(42.7%, 405건)과 광업(27.4%, 260건)이 가장 많았다. 승인율은 광업이 90.4%로 가장 높았고, 건설업(75.3%), 제조업(55.8%), 운수창고 및 통신업(50.0%) 순이었다. 신청된 건들을 직종별로 살펴보면, 단순노무 종사자(47.5%, 452건), 기능원 및 관련 기능 종사자(17.6%, 167건)와 장치・기계조작 및 조립 종사자(16.3%, 155건) 순서로 나타났다.
■ 국내 직업성 암 인정이 적은 이유와 대책은?
이처럼 국내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직업성 암 발병이 확인되는데도, 국외보다 신청과 인정 사례가 적은 것은 직업성 암의 발병 특성이 한몫했다. 직업성 암은 유해물질 노출 이후 10∼40년 뒤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산재 인정이 어려운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퇴직자와 사망자,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등은 직업성 암이 발병해도 산재 신청 등에서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산재 신청에 불이익을 주는 기존의 기업 문화가 있었던 데다, 기업·고용주가 암 발병 가능성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았던 것도 배경으로 꼽힌다. 암이 발병해도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꺼리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권동희 노무사는 “국내 직업성 암 산재 신청이 적었던 것은 군사적 노무관리문화가 회사를 지배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내에서 노동자들은 직업병을 인식하거나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령 제철소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발암물질 및 직업병에 대한 교육과 안내가 전무했다. 3디(D) 프린터에 대해서도 정부는 이 기기의 사용과 교육을 장려하면서도 직업성 암이 발병할 가능성과 유해성에 대해 교사들에게 어떤 안내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 보건의료노조 생명홀에서 '우리나라 직업성 암 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시민단체 직업성·환경성 암 환자찾기119(직업성암 119)와 노웅래·정춘숙(더불어민주당)·강은미(정의당) 의원실이 주최했다. 사진 박준용 기자
대안으로는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을 넓히고, 의료기관의 직업성 암 확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이 꼽혔다. 이 소장은 “발암물질 대상으로 규정하는 유해인자 범위를 확대하고, 병원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직업성 암인지를 체크해서 신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규 반올림 상임활동가(노무사)도 “회사의 영업비밀 등 정보공개 거부 때문에 여전히 직업병 입증은 어려운 작업이고, 특히 인정 사례가 없는 산업·공정·업무·질병 등에 대해서는 입증 난이도가 매우 높다. 직업성 암에 대한 사회적 지식의 한계를 감안할 때, 직업성 암은 ‘인과관계’가 아닌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 노무사도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질병과 업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추정의 원칙’을 구체화해서, 직업성 암이 인정되도록 법률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직업성 암을 선제적으로 찾아내는 것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예컨대 자신의 직업군을 입력하면 그와 비슷한 직업성 암 사례를 찾아서 산재 신청 내역과 승인 여부 등을 찾아보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활용해 업종별 직업성 암 발병을 연구한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연구에 참여한 윤진하 연세대 의대 교수는 “암에 걸린 근로자가 손 내밀길 기다릴 건지 찾아나설 건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데이터로 직업성 암을 찾아나서고 관리해야한다”고 말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