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겨레>는 악성 메일이 예상되는 온라인 기사에 ‘사전 경고문구’를 붙일 수 있도록 했다. ‘기자 개인을 상대로 욕설, 협박을 비롯한 악성 전자우편을 보내는 경우 수사기관을 통해 발신자를 추적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겨레>는 지난해부터 2차 피해가 예상되는 기사에 한해 포털 댓글창을 선택적으로 닫는 방안도 실시해왔다. 류이근 편집국장은 사내 메일을 통해 “이런 문구가 악성 댓글을 늘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현장 기자들에 대한 사이버 폭력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도 올해 초부터 악성 메일·댓글에 대한 기자 보호 대책을 도입했다. 기자들이 받은 악성 메일을 회사 신고 계정으로 전달만 하면, 회사 명의의 경고 메일이 발송된다. 기자들이 특정 단축키를 누르면 자신의 기사에 사전 경고문구도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장은교 젠더데스크는 통화에서 “기자들이 악성 메일이나 댓글에 많이 공격받고 노출돼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쩔 수 없지’라며 포기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메일을 다 읽는 것도, 데스크나 선배들에게 설명을 하는 것도 힘들어하더라. 이런 대책이 실제 악성 메일과 댓글을 줄이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 못했지만, 기자들이 보호받고 일할 권리가 있음을 회사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다”고 도입 이유를 설명했다. <조선일보>도 노조 쪽 요구에 따라 회사 쪽이 조만간 비슷한 대응책을 마련해 실시에 들어간다고 노조 관계자는 밝혔다.
<언론인과 디지털 괴롭힘> 연구서에 실린 설문 조사 결과 가운데.
기자들을 상대로 한 ‘디지털 괴롭힘’ 현상에 대응하는 언론사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엔 한국기자협회가 특정 기사와 기자 관련 정보를 모아 공개하는 이른바 ‘박제’ 사이트 고발에 나섰다. 독자들의 비판을 ‘숙명’처럼 여겨온 언론계가 이런 대책 마련에까지 나선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책으로 펴낸 <언론인과 디지털 괴롭힘>(박아란·이나연)에는 국내 기자 404명이 답한 설문 조사 결과와 함께 심각한 디지털 괴롭힘을 겪었던 기자 15명의 심층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에서 기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힘겹게 털어놨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기사를 쓴 뒤 각종 커뮤니티에 기사와 함께 저를 욕하는 댓글이 달렸고 메일주소가 공유됐습니다....소셜미디어의 프로필 사진 등이 기자 박제 사이트에 게재됐습니다. 제 사진뿐 아니라 지인들 사진도 모자이크 없이 올려놨습니다. 고민 끝에 사이트 운영진에게 지인들 사진만이라도 내려달라고 이야기했고 이후 사진에서 지인들만 지워졌습니다.”(한 일간지 기자)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악플을 다는 경우가 많아 회의감이 듭니다...질 좋은 기사를 써야겠다는 의욕이 떨어집니다.”(한 경제지 기자)
“주로 이메일을 활용했고 익명이었습니다. ‘페미는 정신병이다. 이 정신병자야’ ‘니가 쓰는 글은 쓰레기다’ ‘이런 기사는 사회의 악이다’ ‘가족 모두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길 바란다’ 등이 기억이 납니다.”(또 다른 일간지 기자)
<언론인과 디지털 괴롭힘>에 실린 설문 조사 결과 가운데.
박아란 언론재단 책임연구위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팩트에 기반한 비판은 도움이 된다는 반응도 많았다. 하지만 건전한 비판이 아닌 언론혐오에 가까운 디지털 괴롭힘은 기자의 자존감 상실이나 심리적 외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언론인 혹은 언론 전체의 위축, 자기검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 저하와 맞물려 있는 현상이라 단시일 내 해결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언론 소비자들 역시 기자에 대한 디지털 괴롭힘이 미디어 이용자의 알 권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조사를 보면 기자들은 우울감과 트라우마, 이직 충동을 호소할 뿐 아니라 민감한 기사를 쓸 때 “더 나아가고 싶어도 이쯤에서 멈추자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박 연구위원은 “심층 인터뷰의 경우 대상자들이 신원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해 함께 줌으로 모이는 자리를 갖는 것도 꺼려하더라”며 “기자들 개인이 대응케 하는 것 또한 2차 가해다. 언론사별 대응책뿐 아니라 유관 단체의 가이드라인 마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진이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디지털 괴롭힘이 발생하는 기사 주제는 정파적 이슈, 사회갈등적 이슈, 대통령 관련 주제, 젠더/페미니즘, 성폭력/미투 순으로 많았다. 발생 경로는 댓글, 이메일, 특정 사이트나 커뮤니티 순서였다. ‘자신의 기사가 박제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기자가 54.7%에 달했고, 특히 정치 성향이 진보적인 언론사에서 10명 중 7명 이상이 디지털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사 유형이나 언론사 정치 성향은 경험 빈도와 큰 관계가 없었지만, 여성 기자와 평기자가 느끼는 심각성과 경험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등 기자의 성별 및 직급에 따른 격차가 컸다.
외국의 대응 동향, 법률적 쟁점, 제도적 제언까지 두루 다룬 이번 연구서 본문은
언론재단 누리집에서도 볼 수 있다. 김영희 선임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