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비에스(SBS)에서 분사한 드라마 제작자회사 스튜디오S 직원으로 지난 1월30일 극단적 선택을 한 고 이힘찬 프로듀서의 동생 이희(왼쪽 둘째)씨 등이 3일 오후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노사 공동조사위 구성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한달여 전 <에스비에스>(SBS)의 자회사 스튜디오S에서 일하던 드라마 프로듀서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과 관련해 유족과 대책위원회가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들은 그동안 비공개적으로 노사 공동조사위 설치를 요청했지만 회사 쪽이 거절해 사안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올해 34살의 드라마 프로듀서 이름은 이힘찬. 5월께 <에스비에스>에서 방영 예정인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를 담당하던 그는 촬영이 시작된 지 20여일 만인 지난 1월30일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12년 에스비에스 제작운영팀에 신규입사해 재무팀을 거쳐 2017년부터 드라마운영팀에서 마케팅을 맡다가 프로듀서로 직무를 바꾼 고 이힘찬씨는 그동안 <사의찬미> <초면에 사랑합니다> <아무도 모른다> 등 드라마를 맡았다. 2020년 에스비에스가 드라마본부를 분사할 당시 스튜디오S로 전직한 뒤 지난해 선임 사원으로 승진했다. 대책위는 프로듀서가 “연출과 함께 프로그램 제작 전반의 과정을 관리·감독하는 제작부의 수장으로 연출·조연출과 협의해 드라마가 적정 예산으로 정확한 스케줄에 방영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스튜디오S 쪽의 설명을 전했다.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는 유족 대표인 동생 이희씨와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 정형택 언론노조 에스비에스(SBS)본부장, 돌꽃노동법률사무소의 김유경 공인노무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김영민 센터장이 참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 18일 유족과 스튜디오S 쪽이 처음으로 공식 면담을 했지만, 회사 쪽이 내놓은 조사 결과는 원인과 재발방지 대책 등에 대한 입장 없이 동료들 인터뷰를 서술한 10쪽이었다. 유족 뜻에 따라 사흘 뒤 노사조사공동위를 구성하자는 공문을 노조가 발송했지만 지난 23일 에스비에스와 스튜디오S는 각각 참여 거부를 통보했다. 에스비에스 쪽은 “자회사의 일”이란 이유를, 스튜디오S 쪽은 “유족과 성실히 협의하면 되지 노사공동조사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희씨는 “회사 쪽은 프로듀서가 힘들다 힘들다 토로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했다. 프로듀서 일은 원래 그렇다고 했다. 더이상 책임질 부분이 없다는 분위기에 유족들 가슴에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말했다. 스튜디오S의 경우 공식 면담 이후 ‘퇴직금 정산’ 외에 추가연락을 해온 일이 없다고도 했다.
평소 업무 관련 메모를 자신의 카톡에 남겼던 고 이힘찬 프로듀서는 29일 ‘모든 게 버겁다..’는 말을 남겼다. 유족 제공
이힘찬씨가 본인에 남겨놓은 마지막 카톡 메모는 ‘모든 게 버겁다’였다. 머리맡에는 ‘CG 우선 요청 리스트’를 비롯한 업무 관련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회사 쪽은 촬영 직전에 애로사항을 해소해줬다고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제작 일정이나 예산 문제 등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 명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게 대책위 쪽 입장이다. 블록버스터급으로 알려진 이 드라마는 오티티(온라인동영상서비스) 업체 한곳과 계약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일정이나 예산 압박 등이 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씨제이 이엔엠>(CJ ENM)의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이었던 이한빛 피디, 2년 전 <청주방송> 이재학 피디에 이은 이번 사건에 대해 김유경 공인노무사는 “왜 방송사들은 누군가 죽거나 다치면 항상 ‘방송바닥은 원래 그렇다’는 한마디로 책임을 다한듯 말하고 고통은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떠안아야 하나. 한국 드라마가 전례 없는 활황을 맞고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시점에 죽음이 되풀이된 데 대해 분명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힘찬씨가 10년 전 입사 당시 썼던 증명사진은 그의 영정사진이 됐다. 유족과 대책위 쪽은 “8일까지 회사가 응답해주기 바란다. 회사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단독 조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을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튜디오S 쪽은 “아직 대책위의 공문이 접수되지 않아 오는대로 검토하고 논의한 뒤 추후 입장을 전달하겠다”고 에스비에스 쪽을 통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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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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