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 경기방송지부 지부장 장주영 피디(오른쪽)와 소영선 피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민주노총 경기지역본부가 ‘연대’의 의미로 내어준 작은 이 공간은, 이들에겐 유튜브 영상을 눈치보지 않고 찍을 수 있는 소중한 ‘스튜디오’다. 수원/김영희 선임기자
2020년 3월30일 FM 99.9㎒(메가헤르츠) 라디오 <경기방송>이 멈춘 파장은 컸다. 지상파 사업자의 첫 자진폐업으로 청취자들은 즐겨 듣던 라디오를, 임원 포함 정직원 33명과 프리랜서 60여명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1380만 도민이 사는 경기 전역에 방송되던 유일한 지역민방 라디오가 이사회 결정 뒤 한달여 만에 ‘속전속결’로 사라지는 과정에서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는 무기력했다. 새 사업자 선정 때까지 방송 중단을 유예하는 것조차 강제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방통위가 재승인 기준점수에 미달한 종편 등을 번번이 살려주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이후 나왔다.
그로부터 2년, ‘황금주파수’라던 99.9㎒의 새 사업자는 아직도 미정이다. 심사에서 1위를 한 도로교통공단이 도로교통법상 종합편성채널 운영하는 게 가능한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난달 21일 최종결정이 보류됐다. 방통위는 법률요건을 검토 중인 상황인데, ‘불가’ 결론의 경우 2위 업체로 넘어갈지 여부 등 모든 게 안갯속이다.
얼마 전 경기도 수원에서 만난 언론노조 경기방송지부장 장주영(39) 피디와 소영선(49) 피디는 “다시 끝나지 않는 터널 속 느낌”이라고 말했다. 조속한 사업자 공모를 촉구하며 2020년 여름부터 과천청사 앞에서 1년2개월간 벌인 수요집회, 65일간의 천막농성을 지나 이제 긴 터널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이들은 또다시 ‘불확실성’이라는 불안 앞에 섰다.
2020년 4월1일, 경기방송 조합원들은 각자 살 길을 찾는 대신 유튜브에 ‘새로운999채널’을 개설했다. 대선에 이어 6월 지방선거를 분석하는 ‘경기도의 선택’ 코너, 지역 이슈를 상세히 파헤치는 ‘도시뉴스’와 ‘지역깐부언론’, 매일 청취자들과 만나는 ‘김피디의 뮤직브이로그’ 등 260여개 영상을 지금까지 업로드해왔다. 장 피디는 “방통위도 초기엔 곧 공모하겠다고 했다. 회사 결정이 황당했지만 뜻있는 사주를 만나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면 내 1년쯤 투자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기방송은 폐업을 결정한 주주총회에서도 배당금을 줬던 20년 연속 흑자 방송사였다. “‘이 방송국이 앞으로 10년이나 갈까’라는 생각이 들던 터였다. 매해 제작비는 줄고 나가는 정규직은 보충되지 않았다. 24시간 100% 자체제작 방송에 피디 티오가 14명이었는데 마지막엔 6명이 일했다. 매일 2~3개 프로그램의 연출과 진행을 하는 피디들에게 나중엔 (회사는) ‘작가가 따로 필요하냐’고까지 하더라.” 노조위원장 자리도 프로그램을 만들며 맡았다. 진행자들의 경력이 쌓여 보수가 올라가면 제작비가 늘어난다며 진행자와 타이틀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소 피디는 “라디오의 장점이 청취자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장수 프로와 진행자가 있다는 걸텐데, 피디로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이라고 말했다.
반면 경기지역 31개 라디오 중 지상파 3사 이외에 유일하게 경기 전역에 깨끗하게 들리는 주파수를 가진 것은 강점이었다. 국도 정보를 포함해 매시 27분과 57분 나오는 교통정보는 운전자들의 벗이었고, 메이저 방송만큼 청취자가 많지 않은 방송국의 피디들은 애청자 딸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된 것까지 기억할 정도로 청취자와 가까웠다. 재작년 가을엔 사업자 선정을 촉구하는 이례적인 ‘청취자’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지금도 ‘새로운 99.9’를 기다리는 청취자 680여명이 네이버 밴드에 모여 사연을 나누고 음악을 올린다.
재승인 취소 위기 끝에 2019년 말 소유·경영 분리, 회사를 비정상적으로 지배하던 전무이사의 즉각 배제 같은 조건으로 방통위의 재허가를 받은 경기방송이 돌연 자진 폐업을 택하자, 소속 기자가 2019년 신년기자회견 때 “자신감의 근거”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물어 ‘정권에 찍혔다’거나 노조의 지나친 경영 간섭 탓이라는 흑색선전이 돌았다. 사실 대주주가 70% 지분을 소유해 방송법 위반 상태였던 경기방송은 2010년 이후 심사 때마다 경영투명성과 편성권 독립 문제 등을 반복적으로 지적받아온 터였다. “진짜 회사가 없어질 것 같아 2019년 재심사 청문회 땐 노조 명의로 방통위에 탄원서도 썼다. 이사회의 폐업 결정 이후에도 최대 투쟁이 고작 근무시간에 ‘빨간 조끼’를 입는 것이었다”며 장 피디는 씁쓸하게 웃었다.
경기방송 사태는 △전파라는 공공재를 사용하는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을 민간에 어떻게 담보할지 △진정한 ‘지역언론’이란 뭔지 △독자생존이 어려운 지역방송 구조의 해법은 없는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방통위의 공청회에서도 지적됐듯 지역민방의 광고매출 대부분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결합판매 지원액이 차지하고, 이외엔 지자체의 협찬과 광고뿐이다. 신규 사업자는 그나마 결합판매 지원 대상도 아니다. 소 피디는 “임금동결할 테니 흑자 났으면 제작비 늘려달라는 요구를 수도 없이 했다. 늘 돌아오는 대답은 ‘잘 만든다고 수익 안 난다. 어차피 광고는 결합판매고 협찬은 보도국 기자들이 해오니 시간만 메꾸면 된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협찬이 목적이 된 보도는 지방정부의 감시·견제보다 홍보자료 중심이 되기 십상이다.
정파 다음날인 2020년 4월1일 유튜브에서 경기방송 조합원들이 시작한 ‘새로운999채널’의 영상 시그널. 유튜브 갈무리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이 많은 지역언론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한선 호남대 교수는 “지역방송, 라디오, 지상파, 케이블 등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지역에 관한 양질의 정보가 늘어났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연구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제대로 공적 책무를 수행하도록 방통위가 플랫폼별로 지역언론의 기준을 최소한 제시해야 한다”고 짚었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는 “언제까지 결합판매에 의존할순 없다”면서 “신문사가 방송을 하는 종편이 생존에 성공했듯, 지역방송이 지역신문 등과 결합해 거점들을 마련하고 제대로 된 지역 뉴스를 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비에스>(CBS)가 ‘노컷뉴스’를 출범시켰듯 혁신적 발상을 주문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정파 당시 19명이었던 노조원 중 현재까지 남은 이들은 피디, 기자, 기술 등 12명. 새 사업자가 선정될 경우 경험 있는 인력들이 필요하겠지만, 모두가 라디오에 돌아갈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어느 피디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시험을 보고 있다. 대부분 마이너스통장에 퇴직금 바닥이 드러나니 불안해한다”라면서도 “그래도 꼭 끝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만들고 싶은 방송이 있냐고 물었다. ‘부장님’이던 선배 소 피디의 기획안을 듣던 장 피디가 가만히 태블릿피시를 꺼냈다.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란 제목의 메모엔 다른 방송의 프로그램 비평과 해결방안,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노조위원장으로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맞아, 너 피디잖아’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소영선 피디(왼쪽)와 언론노조 경기방송지부장 장주영 피디. 수원/김영희 선임기자
단 세개 항목이었던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미디어 공약에서 그나마 지역언론은 언급조차 없었다. 결정이 지연될수록 이 이슈가 ‘관심 밖’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런 지점이다. 지난주 노조는 성명을 내고 방통위가 이달 내 법리검토를 끝마치고 선정결과를 발표하지 않는다면 “대선 결과나 지방선거를 의식한다는 오해를 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방송을 들을 날은 언제일까.
수원/김영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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