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취재 중인 기자들. 한국 현직 기자 10명 중 8명이 업무 수행 도중 트라우마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국 현직 기자 10명 중 8명이 업무 수행 도중 트라우마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기자협회가 여론조사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에 의뢰해 지난해 11월8~18일 남녀 기자 544명을 대상으로 모바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다.
이 조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는 동안 심리적 트라우마를 느낀 적 있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8.7%인 428명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매우 빈번함’은 7.9%(43명)였고, ‘자주 있음’은 19.3%(105명), ‘가끔 있음’은 51.5%(280명)였다.
‘트라우마를 언제 겪었냐’는 질문(복수 응답)엔 ‘취재 과정’(61%)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보도 이후 독자들의 반응’(58.4%)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이어 ‘조직 내부에서 겪는 갈등’(47.9%), ‘취재나 보도 전후 취재원과의 관계’(43.7%), ‘기사 작성 및 보도 과정’(36.4%), ‘보도 이후 소송 등 법률문제’(35.5%) 순이었다.
취재 현장에서 접하는 사안으로 △자연재난 △대형화재 또는 폭발·침몰 사고 △교통사고 △집회 현장 △성폭력 △폭력 사건 △자살 △아동학대 △희생자 가족 및 관련 단체 취재 △정치인 및 정당과 지지자 그룹 △연예인 등 유명인과의 팬클럽 △온라인 커뮤니티 등 15개 항목을 추린 뒤 심리적 트라우마를 얼마나 느꼈는지를 ‘전혀 없음’(0)부터 ‘매우 많이 있음’(4)까지 5개 척도로 표기하도록 하고 평균값을 냈더니 ‘희생자 가족 및 관련 단체 취재’가 2.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아동 학대’ 2.63, ‘자살사건’ 2.52, ‘대형화재 및 폭발·침몰 사고’ 2.25, ‘온라인 커뮤니티’ 2.22 순이었다.
이번 조사 및 분석 과정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안현의 이화여대 교수는 “트라우마 평균값이 2를 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기자들이 업무상 트라우마에 지속해서 노출되고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계속 누적되다가 어느 하나의 계기로 폭발할 수도 있어서 선제적으로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이들에게 그동안의 대처를 중복으로 선택하도록 했더니, ‘휴가 등 현장과의 거리두기’(42.5%)가 가장 많았고, ‘직장 동료 등 주변인들과의 상담’(37.9%)이 그다음으로 많았다. ‘술 또는 수면제 등 약물에 의존한다’는 답변은 27.3%, ‘병원 진료 및 상담소 상담을 받았다’는 응답은 8.6%였다. ‘조직 내 관련 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람은 2.8%에 불과했다. 반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20.6%나 됐다.
기자들은 일상적으로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지만, 이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취재나 보도를 하기 전 회사로부터 트라우마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트라우마 유경험자 428명 중 350명(81.8%)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라는 질문엔 전체 응답자 중 166명(30.5%)이 ‘전혀 없다’고 답했고, ‘거의 없다’는 답변도 162명(29.8%)으로 조사됐다.
김경희 한국여성기자협회장은 “공감은 취재와 기사 작성의 시작점이지만, 기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며 “현장 기자들이 사회 구성원, 특히 약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언론계가 함께 트라우마 예방과 치유 매뉴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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