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 |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도시화가 한창 진행되던 근대 서구사회에서 대중들이 겪었을 시각 경험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껏해야 주변의 자연 풍광이나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는 성당의 벽화 또는 조각품 정도가 시각 자극의 전부였던 이들에게 도시의 화려한 색채는 황홀한 분위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형형색색의 건물과 쇼윈도, 그리고 알록달록한 간판과 옥외광고는 한 도시가 빚어내는 인위적이지만 매혹적인 정경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적하고 단조로웠던 마을에서 도시로 거주지를 옮긴 근대인들에게 도시의 풍경은 어디를 둘러봐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만화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히 시각 자극이 너무 많아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현대 도시가 제공하는 시각 자극이 과하게 느껴진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은혜를 충만히 입은 디지털 전광판이 특히 그렇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내가 이용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인데 어디를 이용하든 대형 디지털 전광판이 압도하듯 신호 대기 중인 나를 맞이한다. 하나둘 생겨나더니 20여분 걸리는 출퇴근길에 최소 3개 이상의 디지털 전광판을 맞닥뜨려야 할 정도로 늘어났다.
디지털 전광판은 도시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결정짓는 디자인 미학의 요소로 간주되며 성장이 기대되는 산업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본질 중 하나는 디지털 전광판이 정보와 뉴스를 유통시키는 미디어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전광판의 설치와 운영 관리가 도시 디자인이나 광고 산업적 측면에서만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사가 운영하는 디지털 전광판의 경우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디지털 전광판이 어엿한 뉴스 매체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계기가 있었다. 종이신문의 열독률이 10% 내외에 머무는 현실을 고려하면 어쩌면 종이신문보다 전파력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 계기였다.
내가 위원으로 활동 중인 언론중재위원회에 지역의 군소 언론사를 상대로 소가 제기된 것이었는데, 신청인의 주장과 진위 여부를 떠나 흥미로웠던 대목은 신청인을 진짜로 괴롭힌 장본인이 종이신문이 아니라 디지털 전광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도시 한복판의 전광판에서 자신에 관한 뉴스가 대문짝만하게 반복적으로 노출돼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고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전광판 뉴스는 언론의 범주에 속하지 않아 피해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그 신청인도 종이신문을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쉽게 말해 디지털 전광판에서 사실과 다른 기사가 나오거나 명예를 실추할 만한 내용이 송출된다 할지라도 피해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광판 뉴스만이 아니다. 근래 가장 강력한 뉴스 유통 채널로 손꼽히는 에스엔에스(SNS)도 피해를 구제해야 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언론사가 운영하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계정도 마찬가지다. 또 언론사 기자가 잘못된 기사를 열심히 퍼 날라도 피해를 호소할 길은 없다.
그러나 앞서 신청인의 사례가 보여주듯 이들은 언론사와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한다. 노출 빈도와 파급력 측면에서는 전통 미디어를 능가할 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사회적 파급력이 커진 이들의 책임감 있는 뉴스 유통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소한 언론사가 운영하는 전광판이나 유튜브 채널만이라도 저널리즘 책무를 다하도록 피해 구제의 대상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