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노동 일간지 <매일노동뉴스>가 18일 창간 30년을 맞는다. 지난 15일 매일노동뉴스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부성현 대표이사. 최성진 기자
지난 15일 <매일노동뉴스>는 지령 7402호를 찍었다. 서울행정법원이 <문화방송>(MBC) 보도국에서 일하다 해고된 방송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는 판결 소식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표지 포함 28쪽으로 된 잡지 판형의 이 매체는 1면부터 28면까지 온통 ‘노동’으로 채웠다(심지어 몇 안 되는 광고에도 어떻게든 ‘노동’이 들어갔다). 월~금요일 주 5일 발행하는 국내 유일의 노동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는 이날까지 꼭 30년간 노동 소식을 전했다. 18일이면 창간 30년을 맞는다.
부성현 대표이사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매일노동뉴스 회의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1992년 7월18일 피시(PC)통신 하이텔을 통해 독자와 만난 것이 매일노동뉴스의 시작”이라며 오래된 기억을 소환했다. 당시만 해도 자체 기사 생산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라 ‘뉴스 큐레이션(특정 주제에 맞는 정보를 선별해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 서비스를 중심으로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때 기존 언론은 노동 현장이나 노동조합에 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끔 나오는 노동 관련 뉴스와 각급 노동조합이 내는 성명이나 논평 등을 모아 피시통신에 올리는 것으로 시작한 겁니다.”
매일노동뉴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지역과 업종에 걸쳐 폭발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투쟁, 곧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나게 된다. 이 투쟁은 1990년 2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출범으로 이어지고, 전노협은 또 매일노동뉴스 창간에 관한 제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즈음 낯익은 이름이 등장한다.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2012년 5월18일 열린 매일노동뉴스 창립 기념일 방담회. 매일노동뉴스 제공
“전노협 결성 이후 현장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위해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이를 위해선 현장에 미칠 영향력을 감안해 제대로 된 노동 언론이 필요하다는 게 노회찬 선배의 생각이었고요.” 매일노동뉴스 창간 배경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가 있다는 사실은 노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진정추의 조직위원장이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었다.
노 의원이 매일노동뉴스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 매체는 1993년 5월19일 192호부터 지면을 발행하며 본격적으로 일간지의 꼴을 갖추게 되는데, 노 의원은 초대 발행인이자 대표를 맡아 2003년까지 이끌었다. 제호 매일노동뉴스에 ‘매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그의 작품이다. 노 의원은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자신을 소개할 일이 있으면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었다고 한다. 매일노동뉴스에 대한 그의 마음은 애틋하고 각별했다.
1998년 5월1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매일노동뉴스> 창간 5돌 기념식에서 조남홍 경총 부회장,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 이기호 노동부 장관, 김원기 노사정위 위원장,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대표(왼쪽부터) 등이 기념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당시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노회찬 선배가 제호에 굳이 ‘매일’이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노동 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힘겹게 일하고 때로는 목숨 걸고 투쟁하는데, 누군가는 어렵더라도 ‘매일매일’ 그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부 대표이사는 “매일노동뉴스가 노동 현장은 물론 사용자 쪽인 기업, 노동부 등 정부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 건 노 선배 주장대로 일간 인쇄매체로 발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6년 11월25일 <한겨레>는 매일노동뉴스를 주목할 만한 ‘대안미디어’ 중 하나로 꼽으며 이런 표현을 썼다. “보수적인 자본가부터 가장 진보적인 노동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열독하는 매체.”
1998년 5월 한자리에 모인 <매일노동뉴스> 노동정책정보센터 노회찬 대표와 <매일노동뉴스>를 만드는 사람들. <한겨레> 자료사진
실제 매일노동뉴스 전체 구독 매출의 절반은 지금도 고용노동부와 노동위원회 등 정부 기관, 기업 쪽에서 발생한다. 나머지 절반은 각급 노동조합에서 일으킨다.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하되, 합리적 노사관계의 틀 위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초기 편집 방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간 10년을 넘긴 2003년 매일노동뉴스는 2기 박승흡 대표이사(현 회장) 체제로 전환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교사 출신인 박 대표는 학원 사업 등으로 모은 돈을 2000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설립과 매일노동뉴스 운영에 ‘쏟아부었다’. 노 의원과 많은 활동가의 헌신이 매일노동뉴스의 출범을 이끌었다면, 박 회장은 매일노동뉴스가 30년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렛대’ 구실을 했다는 것이 부 대표이사의 설명이다.
부성현 대표이사가 지면 발행 첫 호인 1993년 5월19일치 <매일노동뉴스>를 펼쳐 보이고 있다. 최성진 기자
독립 언론이 매일 신문을 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취재와 편집은 물론 인쇄, 배달 관련 인력과 조직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운동 활동가들한테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만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2000년대 초반 적자가 심해져 노동 언론을 내세우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제때 임금을 주기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노 선배와 박 회장은 물론 어려울 때 함께 버텼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매일노동뉴스 30년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2008년 기자로 첫 인연을 맺은 뒤 2017년부터 매일노동뉴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가 이 매체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을 꼽는 데는 이런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는 “2010년께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이라는 일본의 노동단체 활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매일노동뉴스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에 천착하는 매체가 이렇게 오래 버텨왔다는 게 놀랍다’며 우리 신문을 챙겨간 일이 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다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부 대표이사의 가장 큰 걱정은 다시 ‘생존’이다. 특히 6·1 지방선거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구독이 많이 끊겼단다. 이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노동조합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는 게 부 대표이사의 말이다.
“사실 노조 조직률을 보면 아직 우리 신문이 들어갈 공간은 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 언론과 노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순망치한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서 매일노동뉴스를 더 많이 읽어줬으면 하는 이유입니다.”
최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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