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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언니·오빠들에게 33년만에 ‘부친의 부고’ 전합니다”

등록 2022-10-23 22:05수정 2022-10-24 02:35

[기억합니다] 고 박남업 자혜의원 원장 기리는 막내딸의 글
1971년 서울 응암동 자혜의원 시절 박남업 원장이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살 막내딸 윤경씨를 안고 있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71년 서울 응암동 자혜의원 시절 박남업 원장이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살 막내딸 윤경씨를 안고 있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89년 10월 23일 박남업 자혜의원 원장 별세. 향년 71.’ 부친의 33주기를 지내며 혹여 북녘에 두고 온 부친의 첫 부인과 2남1녀 가족들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새삼 부고를 띄웁니다.

‘1918년 12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부친 박승락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평양 광성고보를 거쳐 1940년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 졸업. 고향에서 의원 개업했다가 강서종합병원과 함흥 철도병원 내과의사로 근무. 1945년 해방 직후 평양중앙병원 근무하고 교육성에서 러시아 의학서적 번역 담당 교수로 재직(독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10여개 나라 언어 능숙). 1947년 평양의대(김일성대 의학부 전신) 내과 교수로 김일성 주치의 내정’.

1950년 12월 부친은 할아버지와 삼촌 4명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급박하게 떠나오느라 남겨둔 부인과 자식들이 이후 평생토록 부친의 삶에 족쇄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겠지요.

부친은 부산 부전동의 ‘변 내과’에서 일하다 1952년 강원도 춘천 소양호 근처에서 ‘대중의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런데 휴전 직후 1954년 4월 아버지와 큰삼촌은 월북 기도 혐의로 육군특무대에 의해 체포되어 군사법원에서 징역 15년과 10년을 선고받고 수감됐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노린 이종사촌과 결탁한 특무대의 공작이라고 호소했으나 무시됐다고 했습니다.

서울 마포교도소를 거쳐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부친은 여러 장기수의 옥중 주치의 노릇을 했습니다. 특히 1989년 별세하신 신현철 선생님과는 오래도록 우정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1968년 11월30일 서울 종로에서 평양 광성고보 16회 동기들 기념사진. 서 있는 사람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버버리코트 차림이 부친 박남업 원장이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68년 11월30일 서울 종로에서 평양 광성고보 16회 동기들 기념사진. 서 있는 사람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버버리코트 차림이 부친 박남업 원장이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60년 4월 혁명 덕에 10년으로 감형된 부친은 1964년 풀려나와 이듬해 서울 신설동에서 ‘대양의원’을 열었습니다. 처음 개원했던 ‘대중의원’을 특무대에서 북을 이롭게 하는 상호라고 공격했기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지요.

1966년 어머니를 만나 재혼한 부친은 서울 응암동으로 이주해 ‘자혜의원’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분단 이전 평양의대의 부속병원 이름이 자혜의원이었습니다. 1968년 4월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출생과 동시에 이산가족의 일원이 됐습니다. 옥중에서 인연을 맺은 여러 장기수 선생님들을 비롯해 병원비가 없는 환자를 무료 진료해주고 쉬는 날도 없이 언제든 환자를 맞아준 까닭에 의원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문턱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던 1975년 8월 이번에는 치안본부 정보과에서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부친을 끌고갔습니다. 진료실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이북 방송을 듣고 지인들에게 퍼트렸다는 이유였지만, 아버지는 그저 음악으로 향수를 달랬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혹독한 고문 끝에 4년형을 받아 두 번째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감방 동기’였던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는 훗날 부친이 고문 후유증으로 힘든 상태에서도 수감자들의 주치의로 봉사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부친은 1979년 8월 만기출소한 뒤 서울 서대문에서 자혜의원 간판을 다시 걸었습니다. 1980년엔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 선생님의 부인 강순희님이 폐결핵 중증 상태로 찾아왔습니다. 부친은 서울대 의대 동기들을 통해 신약을 구하는 등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치시키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해 부친은 쓰러지는 날까지 결코 의원 문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1975년 1월 서울 응암동 자혜의원 시절의 박남업 원장. 그해 8월 ‘긴급조치 9호’로 두번째 투옥됐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75년 1월 서울 응암동 자혜의원 시절의 박남업 원장. 그해 8월 ‘긴급조치 9호’로 두번째 투옥됐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80년 3월 서울 서대문에서 다시 개원한 자혜의원 시절의 박남업 원장 모습이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1980년 3월 서울 서대문에서 다시 개원한 자혜의원 시절의 박남업 원장 모습이다. 사진 박윤경씨 제공

부친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화장해서 뿌리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찾아올 수도 있다며 그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머지않아 반드시 통일은 이뤄질 테니 아버지처럼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가라는 당부을 하셨지요.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올 때 셋째 윤주가 여섯 살이었는데…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누군가는 얘기합니다. 북쪽 최고 권력자 주치의였으니 대우받으며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남쪽으로 피난 온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저 역시 궁금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묻지는 못했습니다.

북녘 땅의 윤병·윤정 오라버니와 윤주 언니, 경기도의 한 공원묘지에 모셨던 아버지를 오랜 기간 삶을 나눴던 여러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묘역으로 옮겨 드리려고 합니다. 그곳엔 아버지처럼 분단의 슬픈 사연을 지닌 분들도 많으니 서로 다독거리며 위로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불과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지구촌 어디든 이동 수단과 거리, 시간을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 설정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북녘입니다. 이런 이상한 현실이 계속되어 분단까지 무감각해질까 봐 걱정입니다. 그런 망각은 하지 않도록, 이렇게나마 북녘에 소식을 남깁니다.

막내딸/박윤경 주주

원고료를 드립니다 -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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