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맏손주 결혼식 때 함께한 박준기(왼쪽)·명수씨 부자. 박명수 주주 제공
아버님은 생전에 “ 내 친구들은 벌써 증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자랑하던데 나는 언제쯤이나 될는지 모르겠구나 ”라며 자주 혼잣말처럼 되뇌셨습니다 . 이웃 친구가 증손자를 본 것을 시샘하는 말씀입니다 . 마침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 손주며느리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 아버님께서는 이제 증손주를 보게 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
그런데 호사다마 라고 했던가 . 그 몇 달 뒤 , 아버님은 갑자기 담도 결석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 그 길로 회복하지 못하신 채 여든여섯해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 2020년 7월이었습 니다 .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뒤 79일 만에 증손자가 태어났습니다 . 끝내 증손자를 안아보는 소망은 이루지 못한 채 가신 겁니다 .
1935년 태어난 아버님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4 형제와 함께 어렵게 자랐다고 하셨습니다 . 결혼하고도 가정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고향을 등지고 저와 바로 아래 동생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했습니다 .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해야 했기에 어린 형제를 집주인 청년에게 맡기고 아침 일찍부터 나가셨습니다 . 아버님은 하루 종일 숯을 구워 서울 인근 시장에 내다 파셨고, 어머니는 화전민의 야산에서 채소를 키우거나 산나물을 뜯어다가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서울 인근 노점에서 파셨습니다 .
그러다 아버님에게 심각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 병명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 병 · 의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 결국 부모님은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 채 가평 생활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 그런데 다시 고향 고창으로 돌아오니 그렇게도 힘들게 했던 질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
아버님은 워낙 손기술이 좋고 재주가 많으신 분입니다 . 고향에는 아버님 기술이 필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 목수 , 이발 , 보일러 수리 , 두부제조 등 못하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 생전 사시던 집도 아버님이 직접 손으로 지었습니다 .
2019년 고창 심원의 자택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생전의 부친 박준기씨. 박명수 주주 제공
아버님은 어머님을 먼저 떠나보내신 뒤 13 년 동안 손수 끼니를 챙겨드시며 홀로 사셨습니다 . 하지만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항상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사셨습니다 . 건강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면서 소소하게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셨고 말년에는 염소 몇 마리도 키우셨습니다 . 그 좋은 재주로 주변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 고향 동네 이웃들 대부분은 노인층이어서 생활에 불편한 일이 발생해도 수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 아버님은 동네의 유용한 일을 처리하고 수리해 주는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 주민들이 부르면 아버님은 그 즉시로 달려가 무보수로 처리해주셨습니다 . 보일러 , 전기 배선과 스위치 , 가전제품 연결 , 수도나 하수구 뚫기 등등 어디든 달려가 해결해주는 ‘월산리 박반장’ 같은 분이셨습니다 . 아버님이 소천하시기 2 주 전에도 옆집에 있는 블록 담장을 친히 쌓아주셨다 합니다 .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참으로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 아버님은 홀로 사시면서 병이 들어 아프셔도 우리들에겐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 6 명의 자녀들이 잘 사는 것만을 자랑스럽게 여겨주셨습니다 .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이제야 절감합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 이라 해서 천붕 이라고들 합니다 . 해를 거듭할수록, 생전의 손때 묻은 물건을 볼 때마다 아버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 아버님이 수술 뒤 병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 조심히 가라, 조심히 가 ”였습니다. 그 아버님이 보고 싶습니다 .
고창/박명수 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