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기자와 88년생 ‘창간둥이’ 3명이 함께한 ‘나와 한겨레’ 좌담회가 지난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1988년 5월15일, 백두산 천지 사진을 1면에 올린 <한겨레> 창간호가 발행됐다. 15일은 한겨레가 세상에 나온 지 꼭 35년이 되는 날이다. 국민주를 모아 36면 종이신문을 만든다는 소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그때와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많이 다르다. 신문·방송만이 아니라 포털과 유튜브 등 뉴스를 전하는 플랫폼이 새롭게 나타났고, 이용자의 뉴스 소비 행태도 크게 바뀌었다.
한겨레 창간 세대와 1988년에 태어난 이들은 그때와 지금의 한겨레를 각각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한겨레는 창간 35돌을 맞아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간 세대와 88년생들을 모아 한겨레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겨레 창간 세대를 대표해 최영선 사우회장, 88년생으로는 후원회원 박유리씨,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으로 활동 중인 하태욱(과천시청 공무원)씨, 그리고 박다해 기자 등이 참석했다. 좌담회는 지난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8층 대회의실에서 최성진 기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최성진(이하 사회): 한겨레 창간 35주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듣고 싶다.
최영선: 옛날이야기를 하면 꼰대처럼 보일까 싶어 조심스럽긴 하다. 한겨레 창간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잠깐 돌아보면 1980년대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이 청년운동과 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으로 분화하면서 내용적으로 굉장히 풍부해지는 시기였다. 그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응축됐고,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당시 경력기자로 (1988년 3월) 합류했지만 한겨레가 권력의 억압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시대적 합의를 바탕으로 6월 항쟁 이후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만드는 과정에 많은 역할과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다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한겨레가 과연 창간 당시의 시대정신 또는 국민적 열망 등을 잘 담아내고 있느냐 할 때 착잡한 대목이 있다.
하태욱: 1988년이면 내가 태어난 해인데 당연히 우리에겐 6월 항쟁이나 한겨레 창간 모두 피부로 체감되지 않은, 그래서 자료를 통해 학습해야 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창간 35주년이라고 준비 많이 하셨을 텐데, 그게 뭔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겨레가 시도하고 있는 뉴스레터 형식의 서비스 등은 신선하게, 재밌게 보고 있다.
박유리: 한겨레 창간 배경과 그동안의 수고, 역사를 들으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오고 긴 시간 동안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 변화에 잘 적응해서 되게 잘 살아남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나는 그런 역사를 보고 한겨레를 좋아한 게 아니다. 한겨레가 늘 약자의 편에서 젠더 이슈나 외국인, 장애인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주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해줘서 좋았고 자본의 논리대로 글을 쓰지 않아서 좋았다.
사회: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한겨레도 지속 가능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후원제 도입 등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박유리: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에 대한) 언론사들의 논조가 너무 순식간에 바뀌어서 진심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현 정부의 몇몇 장관에게 조국 전 장관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면 버티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김정숙 여사의 옷에 대해 그렇게 떠들던 사람들이 김건희 여사의 경우엔 고가로 추정되는 목걸이를 착용해도 찬양한다. 거기서 너무 충격을 받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겨레 후원제에 참여하게 됐다.
하태욱: 한겨레가 신문사가 아니라 미디어그룹으로서 넷플릭스 등과 경쟁했으면 한다. 나만 해도 ‘롱블랙’(24시간 제한 구독 미디어)이나 ‘셜록’ 같은 미디어를 구독하거나 후원하고 있는데, 결국 좋은 콘텐츠는 돈이 된다. 단순히 문제 제기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해법을 제시하거나 문제가 개선되는 과정을 끝까지 보여주는 솔루션 저널리즘을 적극 실천하는 것도 유료화에 동참할 수 있는 충성도 높은 독자 확보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겨레> 창간 세대와 88년생 ‘창간둥이’가 함께한 ‘나와 한겨레’ 좌담회가 지난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박다해: 넷플릭스가 경쟁자라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예전처럼 민주화라는 가치만으로는 더 이상 외연을 확장하기 어려운 시대다.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미시적인 의제를 계속 개발해나가는 것이 지금 진보 언론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한겨레가 젠더 이슈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게 창간 30주년 때였는데, 젠더를 비롯해 기후 등 진보적 의제를 새롭게 포착해나가는 것도 중요하고 이제는 이런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도 뒤따랐으면 한다.
사회: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정치권력에 대한 한겨레의 보도 태도는 어떻게 평가하나?
최영선: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겨레의 스탠스를 조중동의 대항 매체로 보고 마치 저울추를 걸듯 ‘조중동이 저렇게 나가니까 우리는 이만큼 가줘야 독자들이 시각의 균형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우리 내부에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한겨레가 조중동과 상관없이 언론으로서 정도를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본다.
박다해: 윤석열 정부 같은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우리가 보도해야 하는 방향과 가치에 대해 조직 내에서 큰 이견 없이 의견이 모인다. 보수 정권이 아닐 때, 민주 정부가 출범하면 우리가 권력과 어떻게 비판적 거리두기를 할 것이냐 이 부분에 대한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영선: 그게 창간 때부터 우리 내부의 갈등 요소였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의 평화, 민중 생존권 이런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구체적인 당면 문제로 오면 입장 차이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양김(김영삼·김대중) 분열과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 두 야당에 대해 어떻게 보도를 해야 되는지 등을 두고 내부의 논란이 많았다. (1987년) 대선 때도 진보 진영은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쪽,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쪽, 아니다 독자 민중후보인 백기완 선생을 내세워야 한다는 쪽 등으로 나뉘어 정말 피 터지게 싸웠다. 그렇게 단일한 목소리가 질서정연하게 나오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섞이는 것이 사주가 없는,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의 구조적 한계일 수 있다. 다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을 논조에 일정 부분 반영하되 혼란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에 대해선 내부적으로 계속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우리는 그때 정말 엄청나게 싸웠는데, 지금은 그런 내부 토론이 얼마나 활발한지 모르겠다.
박다해: 한겨레가 그래도 아직은 내부적으로 이런 문제를 서로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인 것 같고, 거기서 희망을 찾고 싶다.
하태욱: 독자로서는 한겨레 내부에서 어떤 토론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잘 모른다. 조직이 민주적이니까 당연히 여러 의견이 오가고 때로는 싸울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치열한 토론 과정을 시민들에게도 개방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한겨레가 더 많은 응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김만배 돈거래 사건’은 언론 전체는 물론 한겨레에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한겨레 안팎의 시각이 궁금하다.
박유리: 별로 실망한 것 없다. 그런 돈 안 받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냥 사회의 어떤 부패한 시스템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한겨레가 더러울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라, 여기도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인데 개인적 일탈을 100% 막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그 일이 벌어진 뒤 자체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하고 보고서를 낸 부분도 좋았다.
최영선: 한겨레 창간 당시는 기자단 간사가 촌지 받아온 뒤 기자실에서 일진 기자들에게 일일이 나눠 주던 시대였다. 우리 창간 세대는 한겨레를 만들 때 스스로 윤리강령을 세워 실천하며 촌지 거부부터 선언했다. 각 출입처에서 알아서 대던 기자실 운영비도 언론사가 내는 구조로 바꾸는 변화를 이끈 곳도 한겨레였다. 그런 만큼 김만배 돈거래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가 받은 충격은 내부 구성원만큼이나 컸다. 창간 세대가 모인 한겨레 사우회 단체 카톡방에도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었지만, 이 문제는 결국 한겨레 구성원들이 시민사회와의 연대 속에서 스스로 해법을 찾는 게 답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김만배 사건과 같은 이런 유혹에 다시 빠지지 않게 하려면 출입처와의 관계, 더 나아가 출입처 제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다해: 한겨레 구성원 모두가 그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엄청난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독자와 시민으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한동안 깊이 매몰돼 있었다. 박유리님 말씀처럼 외려 주변 지인들이 ‘당신이 먼저 이야기 안 했으면 몰랐을 것’이라거나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다’며 위로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론 윤리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 간극이 느껴져서 씁쓸했다. 진상조사위를 대대적으로 꾸려 오랜 기간 조사하고 결과를 낸 건 그나마 한겨레라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뭔가 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이를 바탕으로 무너진 언론 윤리, 신뢰 회복 방안을 두고 내부에서 토론이 지속돼야 한다.
1988년 5월15일 발행된 〈한겨레신문〉 창간호.
사회: 한겨레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최영선: 한겨레가 창간 당시 지향했던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모두 실현되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이다. 평화와 인권, 공정, 차별 없는 사회, 다양성의 존중 이런 시대적 과제 가운데 창간 당시보다 진전을 이룬 것도 있지만 또 다른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가 해야 할 역할은 여전히 있다고 본다. 한겨레가 신문만이 아니라 이제는 종합 미디어로서 좀 더 활발한 내부 토론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독자를 연결해야 한다.
박다해: 좋은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언론사, 좋은 기사를 쓰고 싶어 하는 기자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언론사가 한겨레라고 생각한다. 최근 큰 사건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특정인의 일탈이 우리 내부의 데스킹이나 편집회의 시스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믿음과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과 희망을 놓지 않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싶다.
박유리: 자본의 힘이 막강한 사회일수록 누군가는 힘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해줘야 한다. 한겨레가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노동자, 장애인의 목소리를 꾸준히 전해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지워졌을 것이다. 앞으로 한겨레가 미래를 고민하고 변화를 모색하더라도 그런 일관성은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리 최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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