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가 떠올랐다. 얼마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쩌면 이건 형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 있는 시민을 자임하는 그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 분노와 체념, 다짐, 우울감이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괴로워했다. 어떤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잠시 미디어를 멀리하는 것이 어떠냐는 나의 제안에는 단호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감시의 눈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순간 시지프가 스쳐 지나갔다.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부조리한 형벌. 그가 말한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정치 활동에 장애가 되는 대상을 뜻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언론일 수도 있고 반대 진영의 정치 리더 심지어는 같은 진영의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때는 의기투합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미묘하게 엇갈리며 팽팽한 평행선을 좁히지 못했다. 비슷한 가치지향을 갖고 있지만 팬덤정치의 열혈 지지자로 고군분투 중인 그와 나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분명할 때가 많았다.
한때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낭만화했던 적이 있었다. 인터넷과 에스엔에스(SNS)와 같은 모바일 개인 미디어가 일상화되면서 시민들의 자기표현과 주장이 쉬워졌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더 성숙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더 좋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소외된 목소리가 반영될 길이 열렸다는 환호도 많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공 사례도 전세계적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같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 흐름의 정점에 있는, 이른바 팬덤정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팬덤정치는 혐오와 증오를 기반으로 편을 가르는 당파적인 정치인과, 그런 정파성에 안일하게 기생하는 레거시 언론, 그리고 시민이기보다 지지자로 활동할 뿐인 대중이 합작해서 만든 기형물이다. ‘조회수’와 ‘페이지뷰’, ‘좋아요’를 노리는 상업적인 이해득실과 알고리즘이라는 무책임한 테크놀로지도 한몫하고 있다. 누구 하나의 잘못이나 퇴행이 아니다. 디지털미디어 환경에 연결돼 활동하는 모두가 팬덤정치를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부터 내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팬덤정치가 기승을 부릴 만한 토양이 더욱 기름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팬덤정치와 결별해야 한다. 해묵은 이념논쟁이나 문자폭탄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갈등을 치유할 수 없다. 시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키고 인간관계를 증오와 혐오로 재단하는 데 편승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오만과 독선의 정치는 좋은 사회를 이루기는커녕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팬덤정치의 이익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언론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될 수 없다. 공동체에 보탬이 되지 않는 언론은 우리 사회를 위험에 빠트릴 뿐이다. 지지자가 아니라 시민으로 거듭날 자신이 없는 대중은 성숙한 민주사회를 뒤흔드는 해악이 될 것이다.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정치, 정치공학적인 계산만을 확대재생산하는 언론, 폭력적인 방식일지라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효능감에만 집중하는 대중, 이 모두와 헤어질 결심이 필요하다. 추석 밥상에서 확인한 민심의 경고였다.
한선 호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