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논설위원의 직격 인터뷰 | 한종범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
한종범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면서 1980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20일 만에 관객 700만명이 몰릴 만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진 실제 ‘서울의 봄’에는 또 하나의 묻혀진 역사,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가 자리 잡고 있다. 12·12 다음날인 1979년 12월13일치 석간신문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이라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정 총장을 체포·연행해 조사 중’이라는 길지 않은 내용이다. 전문 게재한 노재현 국방장관의 특별담화문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공관경비병과 경미한 충돌’이라고 보도했다. 사회면에는 그날 밤,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은 한강도로 상황을 전했다. 12·12 다음날, 언론보도는 이게 전부다. 이후에도 12·12 당일 관련 보도는 거의 없다. 계엄 아래 검열 시스템이 촘촘하게 작동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각 언론사 내부에서는 기자들의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광주항쟁 직후인 5월20일부터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각 언론사에서 검열 및 제작 거부 투쟁이 시작됐다. 이는 그해 여름부터 10월까지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41년이 흘러 지난 2021년에 이르러 1980년 언론인 투쟁이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 신군부의 언론학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상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이와 관련해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종범(75) 전 동아방송예술대학 총장(1980년 당시 TBC 기자)을 지난 8일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의 봄’, 언론사 매일 계엄사 기사 검열 받아
―일부 픽션이 섞여있긴 하지만,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많은 젊은 사람들이 ‘12·12를 제대로 알게 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시 언론계 상황은 어떠했나?
“신군부 등장 이전인 유신정권에서도 언론탄압은 극심했다. 1974년 중앙매스컴(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인 내용들은 전혀 보도할 수 없었다. 민감한 취재현장으로 날 보내던 캡(사회부 사건팀장)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사는 못 쓰지만, 역사의 증언자가 될 거다. 빠짐없이 취재하라’고 했다.
물리적인 탄압도 왕왕 있었다. ‘남산’(중앙정보부)에서 기자나 언론사 간부들을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선 1층 로비에서 ‘‘위’(사무실)로 가면 살고, ‘아래’(조사실)로 가면 이제 죽었다’는 말이 있곤 했다. 그런데 10·26이 일어났다. 절대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때 혼란 속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던 것처럼 언론계에서도 이제 검열·통제가 사라진 자유언론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나가던 시기였다. 12·12가 일어나던 1979년 12월을 전후해 언론계에선 유신시대 언론을 반성하고 제대로 된 언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언론자유를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이는 계엄사 검열단에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는 현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2·12 당일 상황을 기억하나?
“당시 계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순 없었지만, 비록 제한적이었다 하더라도 취재 시스템은 가동되고 있었다. 오후 7시20분께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에 나섰다. 정확한 취재가 어려웠지만, 권력집단 내부 분열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당시 계엄 상황에서 군인들이 각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3일 상주 군인들이 일시에 바뀌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착검을 한 새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전방에서 막 내려온 듯한 군인들이 회사 입구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9사단(사단장 노태우) 소속이었다.”
―신군부의 검열이 1980년 5월 제작거부 투쟁을 촉발시킨 것인가?
“당시 각 언론사들이 조간 기준으로 오후가 되면 신문 대장을 들고 서울시청에 있는 계엄사 사무실로 가 검열을 받았다. 1면 제목부터 신문 맨 뒷면 방송 프로그램 작은 글자까지 다 체크했다. 예를 들면, 당시 지식인 선언, 대학가 선언 등이 쏟아졌으나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고,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이라는 말도 신문에 못 쓰게 했다. 대장을 갖고 돌아오면 지적받은 내용을 수정하고, 아예 삭제하라고 한 기사는 미리 준비한 대체 기사로 바꿔 인쇄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기자협회(김태홍 회장)가 5월16일 기협 차원의 제작거부를 결의하고, 20일부터 각 언론사들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그러자 당시 회사 간부들이 ‘그래도 신문은 나와야 한다’며 대신 제작을 했다. 당시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갔는데,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자로서 큰 자괴감이 든다.”
80년 광주항쟁 당시 제작거부 → 기자 대량해고 → 언론사 통폐합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를 통해 확인된 1980년 당시 신군부가 작성한 언론통제 보고서’ 중 취업이 제한된 해직자 명단. TBC 한종범 기자가 ‘극렬 반정부’로 분류돼 있다. 한국기자협회 제공
전두환 신군부가 사전검열을 통해 ‘보도 불가’ 및 ‘부분 허용’으로 판정한 광주항쟁 당시 현장 사진들. 왼쪽 사진에는 ‘불가’ 표시가, 오른쪽 사진에는 ‘검열필’ 도장이 찍혀 있다. 한국기자협회 제공
광주항쟁이 시작된 1980년 5월18일부터 신문 발행이 중단되다가 2주일만에 재발행된 6월2일치 전남매일신문(광주일보 전신) 1면 조판본. 당시 문순태 편집부국장이 김준태 시인에게 요청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 그러나 검열 과정에서 시의 제목은 ‘아아, 광주여!’로 축약되고, 보는 바와 같이 절반 이상이 삭제 표시(‘삭’)돼 있다. 신문에는 검열본이 실렸으나, 전남매일신문은 원본이 실린 신문을 미리 10만부 이상 찍어 외신 등을 통해 퍼져나갔고, 시민들에게도 전달됐다. 이후 편집국 간부들과 시인은 보안사에 연행됐다.
80년 해직 언론인 올해 말까지 보상심의 신청해야
한종범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면서 1980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종범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오른쪽)이 8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현이섭(왼쪽), 신연숙 당시 해직기자들과 한겨레신문사 로비에 있는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인 송건호 선생 흉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과거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언제든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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