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보도준칙 뒷이야기
‘신뢰도’가 장기 발전 전략
전문가 가담 수개월 다듬어
전문 포함 7장 50항 선포
독자 격려·감시 필요합니다 2006년 5월 창간 기념일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연락을 받고 사장실에 들어갔더니 당시 정태기 대표이사가 문득 “신문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화두는 머지않아 전략기획실 차원의 중장기 발전전략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독자와 시장을 조사하고, 안팎에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신뢰가 최고의 상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의 신뢰도(18.5)가 텔레비전 신뢰도(66.6, 이상 한국언론재단 조사)의 1/3에 못미치는 현실에서 한겨레는 전 매체 중 신뢰도 1위(2006년 <시사저널> 전문가 1000명 조사)라는 차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높고 강한 브랜드 신뢰도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 개념인 신뢰를 지면에 구현하자면 일종의 ‘디코딩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기자들이 취재보도의 전 과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규범 같은 것 말입니다. 취재보도 준칙(이하 준칙)은 그런 고민의 귀결이었습니다. 준칙은, 일면 기본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준칙 제정 논의가 공론화됐을 때 기자들 중에는 “신생 신문사도 아닌데 뭣 하려고 그런 것을 만드느냐”, “자칫 잘못하면 우리 발을 스스로 죄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며 항의성 반론을 펴는 이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신문이 기본을 지키지 못할 때 한겨레가 기본을 확실히 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익명 취재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서구의 권위지들은 익명 취재원의 부정적 효과를 깨닫고 이미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은 차츰 나아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겨레 지면에도 ‘관계자’라는 익명 표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우선 자료를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영국의 <가디언>, <에이피>(AP) 등 개별 언론사의 윤리규범은 물론 영국 언론고충처리위원회(PCC) 규정,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자료와 포인터연구소의 각종 연구논문 등을 분석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초안 작성도 함께 해나갔습니다. 초안이 완성된 것은 7월 초. 그러나 때마침 편집국장이 교체되면서 회사 차원의 준칙 제정 논의는 한참 뒤로 미뤄졌습니다. 편집국이 편집장 진용을 새로 갖추고, 가을 지면개편을 하고 난 지난해 12월 초 간부 워크숍을 시작으로 논의가 재점화됐습니다. 김효순 편집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준칙 제정위원회가 출범하고, 그 아래 노사 합동으로 축소심사 소위원회가 가동되면서 준칙의 뼈대를 가다듬고 자구를 수정하는 지난한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어휘 하나, 조사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다듬다 보니 회의에서는 “기자 생활 십 수년에 이렇게 피곤한 일은 처음”이라는 푸념이 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회사 게시판과 이메일 등을 통해 내부 의견을 수렴하면서 이민규 중앙대 교수, 김영욱·남재일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 등 3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해 전문적인 식견을 빌렸습니다. 이렇게 안팎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서 애초 서구형 문체에 가깝게 다소 길고 장황했던 초안의 표현은 법조항을 닮은 날씬한 모양으로 바뀌었고, 중복되거나 흩어져 있던 조항들도 하나 둘 제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근 1개월 보름에 걸친 제정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지난 1월25일. <한겨레>는 나흘 뒤인 1월29일 본사 7층 편집국에서 전 기자와 논설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문(前文)과 부기를 포함해 7개장·50개 조항으로 된 취재보도 준칙 선포식을 열었습니다. 준칙 전문(全文)을 크게 확대한 서명판에는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담아 소중한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준칙 제정 과정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신문 관련 규정 중에 ‘신문윤리강령 실천요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1996년에 만든 이 규정에는 신문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취재보도 관련 윤리가 훌륭하게 정리돼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신문 지면은 딴판입니다. 강제성이 없고, 무엇보다 기존의 행태를 뛰어넘으려는 신문사의 성찰과 기자들의 노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한겨레>가 준칙을 지면에 공표하고, 관리기구를 만들어 운용하기로 한 것은 외부에 ‘원군’을 청하기 위함입니다. 준칙의 실천 과정은 기자들 스스로 몸에 배고 손에 익은 관행과 맞서 싸우는, 지루하고 고통스런 장기전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신뢰도라는 ‘고지’를 향한 이 전쟁에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감시가 절실한 까닭입니다. 강희철/전략기획팀장 hckang@hani.co.kr
전문가 가담 수개월 다듬어
전문 포함 7장 50항 선포
독자 격려·감시 필요합니다 2006년 5월 창간 기념일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연락을 받고 사장실에 들어갔더니 당시 정태기 대표이사가 문득 “신문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화두는 머지않아 전략기획실 차원의 중장기 발전전략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독자와 시장을 조사하고, 안팎에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신뢰가 최고의 상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의 신뢰도(18.5)가 텔레비전 신뢰도(66.6, 이상 한국언론재단 조사)의 1/3에 못미치는 현실에서 한겨레는 전 매체 중 신뢰도 1위(2006년 <시사저널> 전문가 1000명 조사)라는 차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높고 강한 브랜드 신뢰도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 개념인 신뢰를 지면에 구현하자면 일종의 ‘디코딩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기자들이 취재보도의 전 과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규범 같은 것 말입니다. 취재보도 준칙(이하 준칙)은 그런 고민의 귀결이었습니다. 준칙은, 일면 기본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준칙 제정 논의가 공론화됐을 때 기자들 중에는 “신생 신문사도 아닌데 뭣 하려고 그런 것을 만드느냐”, “자칫 잘못하면 우리 발을 스스로 죄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며 항의성 반론을 펴는 이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신문이 기본을 지키지 못할 때 한겨레가 기본을 확실히 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익명 취재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서구의 권위지들은 익명 취재원의 부정적 효과를 깨닫고 이미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은 차츰 나아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겨레 지면에도 ‘관계자’라는 익명 표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우선 자료를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영국의 <가디언>, <에이피>(AP) 등 개별 언론사의 윤리규범은 물론 영국 언론고충처리위원회(PCC) 규정,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자료와 포인터연구소의 각종 연구논문 등을 분석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초안 작성도 함께 해나갔습니다. 초안이 완성된 것은 7월 초. 그러나 때마침 편집국장이 교체되면서 회사 차원의 준칙 제정 논의는 한참 뒤로 미뤄졌습니다. 편집국이 편집장 진용을 새로 갖추고, 가을 지면개편을 하고 난 지난해 12월 초 간부 워크숍을 시작으로 논의가 재점화됐습니다. 김효순 편집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준칙 제정위원회가 출범하고, 그 아래 노사 합동으로 축소심사 소위원회가 가동되면서 준칙의 뼈대를 가다듬고 자구를 수정하는 지난한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어휘 하나, 조사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다듬다 보니 회의에서는 “기자 생활 십 수년에 이렇게 피곤한 일은 처음”이라는 푸념이 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회사 게시판과 이메일 등을 통해 내부 의견을 수렴하면서 이민규 중앙대 교수, 김영욱·남재일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 등 3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해 전문적인 식견을 빌렸습니다. 이렇게 안팎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서 애초 서구형 문체에 가깝게 다소 길고 장황했던 초안의 표현은 법조항을 닮은 날씬한 모양으로 바뀌었고, 중복되거나 흩어져 있던 조항들도 하나 둘 제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근 1개월 보름에 걸친 제정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지난 1월25일. <한겨레>는 나흘 뒤인 1월29일 본사 7층 편집국에서 전 기자와 논설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문(前文)과 부기를 포함해 7개장·50개 조항으로 된 취재보도 준칙 선포식을 열었습니다. 준칙 전문(全文)을 크게 확대한 서명판에는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담아 소중한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준칙 제정 과정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신문 관련 규정 중에 ‘신문윤리강령 실천요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1996년에 만든 이 규정에는 신문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취재보도 관련 윤리가 훌륭하게 정리돼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신문 지면은 딴판입니다. 강제성이 없고, 무엇보다 기존의 행태를 뛰어넘으려는 신문사의 성찰과 기자들의 노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한겨레>가 준칙을 지면에 공표하고, 관리기구를 만들어 운용하기로 한 것은 외부에 ‘원군’을 청하기 위함입니다. 준칙의 실천 과정은 기자들 스스로 몸에 배고 손에 익은 관행과 맞서 싸우는, 지루하고 고통스런 장기전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신뢰도라는 ‘고지’를 향한 이 전쟁에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감시가 절실한 까닭입니다. 강희철/전략기획팀장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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