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현장 상황에 대한 신현석 주 캄보디아 대사의 설명을 취재중인 김남일 기자 (맨 왼쪽)
취재의 추억
“유족들 취재” 명령에 발동동…지루한 교감끝 ‘슬픔’ 모아
기자들은 참으로 이상한 ‘생물’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기자들에게 한 번 ‘물린’ 사람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취재원에게 막무가내로 전화를 걸면서도, 벌건 대낮에 데스크(신문사 편집장)로부터 걸려온 전화 받기는 죽도록 싫어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줄창 떠들면서도, 특종 하나 하겠다고 스스로 따돌이가 됩니다. 일 많아 죽겠다고, 이놈의 나라는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술에 전 눈에선 생기가 돌고 현장에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자학개그’에도 능합니다.
산 사람하테 죽은 사람 취재 낙종하는 것보다 싫어해
그런데 기자들도 ‘물’먹는 것만큼이나 정말로 싫어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뚜렷한 곳, 장례식장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산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합니다. 법의학의 세계에서야 죽은 사람도 말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자는 그리셤(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의 주인공) 반장처럼 ‘망자의 변호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떠난 피붙이의 이야기를 기어이 듣고야 말겠다고 유족들에게 펜과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을 하다 보면 ‘기자질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기자라는 생물도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겠죠.
지난 6월 25일 오후 5시31분. 한국인 13명 포함 승객과 승무원 22명이 탄 캄보디아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바빠지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저에게 캄보디아로 떠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편집국 뉴스사진팀 박종식 기자와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박 기자는 여자친구에게, 저는 어머니(저도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에게 집에 있는 여권을 들고 서둘러 인천공항으로 오라는 전화를 돌렸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타이 방콕공항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니 벌써 몸은 떡이 되어 좁은 좌석에 눌어붙더군요. 그제야 이번 취재도 결국은 유가족 취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 연락해 보니 “유가족 취재가 전혀 안 된다. 모든 취재를 거부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뺨 맞을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맞지도 않은 뺨이 벌써부터 얼얼해지는 느낌.
캄보디아 사고현장 상황실에 가보니 <한겨레>가 한국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터넷 탓에 초 단위 속보 경쟁을 벌이는 언론사에게 하루 먼저 도착했다는 것은 ‘쓰는 것마다 특종기사’라는 것을 말합니다. 추락 여객기 수색 르포 1보가 프놈펜 후미진 골목의 피시방을 통해 서울로 날아갔습니다. 추락 비행기는 유족들이 캄보디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아침에 발견됐습니다. “유족들의 반응을 집중 취재하라”는 잔인한 지령이 회사에서 날아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유족들 숙소에서 3시간 떨어진 현장으로 이동한 탓에 부랴부랴 유족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왕복 6시간을 길바닥에 날린 거죠.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취재 불가.’ 한국에서부터 유족들과 5~6시간 동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에 온 타사 기자들조차 유족들 말 한마디 제대로 건져내지 못했다니, 그 광활한 1면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말한마디 못 건지 1시간여 토로하듯 넘치는 감정 담아 호텔에 도착하니 마감시간까지 두 시간. 취재에 1시간, 기사작성에 1시간을 배분했습니다. 유족들이 묵고 있는 호텔방 한 군데를 열자마자 바로 쫓겨난 뒤 호텔 로비에 무작정 주저앉았습니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입. 유족 몇 분이 제 앞을 지나갔지만 저는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무너지듯 토해낼 수 있는 자리였던 게 아닐까요. 지루한 교감의 시간이 끝난 뒤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주저하던 유족들은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그날의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다른 유족들을 불러 자신의 입을 대신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후속 취재의 생명인 휴대전화 번호도 넉넉하게 딸 수 있었죠. 1시간 만에 신문 1면을 채울 수 있는 슬픔들이 모아졌습니다. 이미 완성된 슬픔이었기에 기사작성에는 30여분이 채 걸리지 않더군요. 모든 것이 결국 취재와 기사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힐난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 취재가, 계속 살아가야 할 가족들 취재가 정말로 싫은 이유입니다. 11년 전 집회에서 숨진 대학 후배의 영안실 앞에서 텔레비전 취재 카메라를 막아서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때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분들은 취재원이기 전에 유족들입니다.” 기자가 된 지금,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희생자들의 안식을 빕니다. 글 김남일 namfic@hani.co.kr/편집국 사회부문 24시팀, 사진 박종식 anaki@hani.co.kr/편집국 뉴스사진팀
캄보디아 사고현장 상황실에 가보니 <한겨레>가 한국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터넷 탓에 초 단위 속보 경쟁을 벌이는 언론사에게 하루 먼저 도착했다는 것은 ‘쓰는 것마다 특종기사’라는 것을 말합니다. 추락 여객기 수색 르포 1보가 프놈펜 후미진 골목의 피시방을 통해 서울로 날아갔습니다. 추락 비행기는 유족들이 캄보디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아침에 발견됐습니다. “유족들의 반응을 집중 취재하라”는 잔인한 지령이 회사에서 날아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유족들 숙소에서 3시간 떨어진 현장으로 이동한 탓에 부랴부랴 유족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왕복 6시간을 길바닥에 날린 거죠.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취재 불가.’ 한국에서부터 유족들과 5~6시간 동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에 온 타사 기자들조차 유족들 말 한마디 제대로 건져내지 못했다니, 그 광활한 1면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말한마디 못 건지 1시간여 토로하듯 넘치는 감정 담아 호텔에 도착하니 마감시간까지 두 시간. 취재에 1시간, 기사작성에 1시간을 배분했습니다. 유족들이 묵고 있는 호텔방 한 군데를 열자마자 바로 쫓겨난 뒤 호텔 로비에 무작정 주저앉았습니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입. 유족 몇 분이 제 앞을 지나갔지만 저는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무너지듯 토해낼 수 있는 자리였던 게 아닐까요. 지루한 교감의 시간이 끝난 뒤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주저하던 유족들은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그날의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다른 유족들을 불러 자신의 입을 대신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후속 취재의 생명인 휴대전화 번호도 넉넉하게 딸 수 있었죠. 1시간 만에 신문 1면을 채울 수 있는 슬픔들이 모아졌습니다. 이미 완성된 슬픔이었기에 기사작성에는 30여분이 채 걸리지 않더군요. 모든 것이 결국 취재와 기사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힐난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 취재가, 계속 살아가야 할 가족들 취재가 정말로 싫은 이유입니다. 11년 전 집회에서 숨진 대학 후배의 영안실 앞에서 텔레비전 취재 카메라를 막아서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때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분들은 취재원이기 전에 유족들입니다.” 기자가 된 지금,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희생자들의 안식을 빕니다. 글 김남일 namfic@hani.co.kr/편집국 사회부문 24시팀, 사진 박종식 anaki@hani.co.kr/편집국 뉴스사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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