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지켜온 다짐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
[한겨레 창간 20돌] 세상을 바꾼 20년
■ 군사정부서 민주정부로
1987년 6월항쟁이 ‘창간의 모태’
군사정권 어둠 걷어내는 불씨 지펴
DJ·노무현 정권 비판도 깐깐하게 <한겨레>를 낳은 태반은 1987년 6월항쟁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16일 전두환 군사정권의 후계자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화를 갈구하던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새 신문 창간을 준비하던 한겨레의 메시지가 다시 희망을 불씨를 지폈다. 그랬다. 88년 5월15일 창간 전부터 민주화는 한겨레의 운명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언론은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소임을 수행해야 한다. 창간과 함께 한겨레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저히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광주항쟁 비극 속의 역사성’(1988년 5월) 등 수많은 기획이 쏟아졌다. 고문경관 이근안의 이름과 사진도 88년 12월 지면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독재정권의 잔재를 걷어내는 일도 시급했다. 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92년 3월, 9사단의 이지문 중위가 군 부재자 투표에 기무사가 개입했다는 폭로를 했다. 90년 1월,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자당으로 이른바 3당 합당을 했다. 그 본질은 보수와 영남의 야합이었다. 한겨레는 3당 합당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민자당 정권은 한겨레를 ‘전라도 신문’으로 몰아붙였지만 그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과거에 비해 민주화된 정권이었다. 그러나 ‘성역’이 존재했다. 94년 3월24일 발행된 <한겨레 21> 창간호의 제목은 ‘황태자 김현철은 성역인가’였다. 94년 4월 한약업사 정재중씨가 김현철씨 쪽에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폭로도 나왔다. 김현철씨는 거액의 소송으로 맞섰다. 97년 3월, 마침내 김현철씨가 <와이티엔> 사장 인사에 개입했다는 물증이 잡혔다. 그는 결국 ‘소통령’ 자리에서 ‘감옥’으로 내려앉았다. 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민주화의 진전이었다. 정치지형의 변화는 한겨레를 여당지 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겨레는 여당지도 야당지도 아닌 ‘독립 자유언론’이었다. 99년 5월24일 정부 고위 관료의 부인들이 개입된 ‘옷로비’ 사건, 대검 공안부의 조폐공사 노조 파업유도 사건(1999년 6월) 등 한겨레가 파헤친 ‘비리사건’들은 김대중 정부의 오점으로 남아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터진 대통령 측근 비리 역시 어느 매체보다 엄정하게 보도했다. 대선 훨씬 전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비비케이’ 의혹에 대해 가장 깊이있고 끈질긴 검증 보도를 했다. 살아있는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한겨레의 존재 이유이자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군사정권 어둠 걷어내는 불씨 지펴
DJ·노무현 정권 비판도 깐깐하게 <한겨레>를 낳은 태반은 1987년 6월항쟁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16일 전두환 군사정권의 후계자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화를 갈구하던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새 신문 창간을 준비하던 한겨레의 메시지가 다시 희망을 불씨를 지폈다. 그랬다. 88년 5월15일 창간 전부터 민주화는 한겨레의 운명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언론은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소임을 수행해야 한다. 창간과 함께 한겨레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저히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광주항쟁 비극 속의 역사성’(1988년 5월) 등 수많은 기획이 쏟아졌다. 고문경관 이근안의 이름과 사진도 88년 12월 지면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독재정권의 잔재를 걷어내는 일도 시급했다. 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92년 3월, 9사단의 이지문 중위가 군 부재자 투표에 기무사가 개입했다는 폭로를 했다. 90년 1월,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자당으로 이른바 3당 합당을 했다. 그 본질은 보수와 영남의 야합이었다. 한겨레는 3당 합당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민자당 정권은 한겨레를 ‘전라도 신문’으로 몰아붙였지만 그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과거에 비해 민주화된 정권이었다. 그러나 ‘성역’이 존재했다. 94년 3월24일 발행된 <한겨레 21> 창간호의 제목은 ‘황태자 김현철은 성역인가’였다. 94년 4월 한약업사 정재중씨가 김현철씨 쪽에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폭로도 나왔다. 김현철씨는 거액의 소송으로 맞섰다. 97년 3월, 마침내 김현철씨가 <와이티엔> 사장 인사에 개입했다는 물증이 잡혔다. 그는 결국 ‘소통령’ 자리에서 ‘감옥’으로 내려앉았다. 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민주화의 진전이었다. 정치지형의 변화는 한겨레를 여당지 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겨레는 여당지도 야당지도 아닌 ‘독립 자유언론’이었다. 99년 5월24일 정부 고위 관료의 부인들이 개입된 ‘옷로비’ 사건, 대검 공안부의 조폐공사 노조 파업유도 사건(1999년 6월) 등 한겨레가 파헤친 ‘비리사건’들은 김대중 정부의 오점으로 남아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터진 대통령 측근 비리 역시 어느 매체보다 엄정하게 보도했다. 대선 훨씬 전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비비케이’ 의혹에 대해 가장 깊이있고 끈질긴 검증 보도를 했다. 살아있는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한겨레의 존재 이유이자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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