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박사 수여식 소동 이후가 더욱 ‘난리’다. “돌출된 행동으로 절제되지 않은 물리적 마찰”이 빚어졌다고 고대 총학생회가 유감을 표시했다. 직접적인 폭력과 물리력은 한참 다르다. 그래서 현장에 있던 삼성 쪽 임원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돌린다. 이 회장 본인도 속뜻은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넘어가려 한다. 오히려 재미있는 것은 해프닝을 대단한 사태로 부풀리고 마구잡이 여론 몰이하는 수구신문이다. 삼성 쪽의 말마따나 원하지도 않는데 과민하게 반응해 오히려 파문을 키워가는 수구신문의 행태다. 목청 높여 ‘폭력사태’로 단정해 놓고 대학의 ‘반지성주의’를 규탄하는 그 의뭉스런 의도다.
〈조선일보〉는 학생들의 “예의가 없는” “난폭한 행동에 혀를 찰 수밖에 없다”고 사설에서 밝힌다. 이런 학생들은 커서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은 무조건 적으로 몰면서 그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박해를 가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지 더 걱정스럽다”고 한탄한다. 빗나간 자식을 훈계하려는, 차이의 코드로 흘러가는 이 시대 청년의 문화에 무지한 아버지의 집착증이 깊이 배어 있다. 매질이라도 하고 싶은 가부장의 뜻은 ‘“총학,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최고” 고대생 분노폭발’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쉽게 드러난다. 무섭다.
‘지성’과 ‘야만’의 이분법이 재가동한다.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노예”, “대학가에 남아 있는 반지성과 폭력성의 일단”에 왜 〈중앙일보〉가 분노하는지는 누구나 잘 아는 바다. 또한 “극소수 학생의 ‘안타까운 탈선’”에 〈동아일보〉가 왜 그토록 안타까워하는지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타 신문들이 더 호들갑인 건 아무리 봐도 우습다. 〈세계일보〉는 “TV를 지켜본 국민들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거라고 단정하면서, 우리 모두를 ‘반지성’ 규탄의 장으로 호명해낸다. 야만과 지성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다그친다. 〈서울신문〉도 “이 회장은 세계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일군 탁월한 경영인”이고 “학생들의 편협한 사고와 행동은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독버섯”이라는 편협한 인식의 틀을 무지막지하게 들이댄다. 삼성은 선이고 학생들은 악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실현에 앞장선 이 회장의 공로를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는 〈문화일보〉 사설은 ‘함께 가요, 희망으로’라는 삼성의 광고를 현실로 착각하고 있다. “치외법권 지역 삼성 왕국이 대한민국과는 별도로 존재한다”는 울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삼성SDI 위원장의 증언을 지웠을 때나 가능한 거짓 신화의 반복이다. 74억원 하는 한국 최고가 저택이 바로 이 회장의 것이고, 가장 최근 회장님은 전용 항공기를 타고 전망 좋은 여수 별장지 4000평을 사러 다니고 있다고 하던가?
아무튼 사건은 더는 교내 이슈가 아닌, 국가적 사안이다. 사회적 위기 사태다. 장관과 청와대 수석까지 학생들을 욕하고 나섰다. 과거의 공안정국이 떠오른다. 대체 이 못 말리는 오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시콜콜한 다툼조차 뻥튀기해 독자를 붙들고자 하는 집요한 선정주의 탓인가? 아니면 한국 최대 광고주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산술적 판단, 과잉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수구신문들이 눈치 봐야 하는 것은 이제 국가 권력이 아니다. 살아있는 이 회장, 삼성, 재벌이 제왕이다. 광고라는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자본이 진정한 이 시대의 주인이다. 그 맹주가 봉변을 당했다. 수구신문들은 일제히 폭력 시위와 법질서, 공권력이라는 낡은 등식을 그대로 대입해 ‘충심’의 시위를 벌인다. 충성 발언의 경쟁을 펼친다. 이번 사태가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비판적 의식을 갖춘 학생들의 폭력성이 아니다. 대학의 반지성주의가 결코 아니다. 자본이라는 권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수구신문의 기회주의다. 자식에게 강하지만 막상 바깥에 나가면 무력한 아버지는 학생들을 혼냄으로써 제왕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한다. ‘삼성 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한 수구신문의 서글픈 초상이다. 근엄한 가장은 말을 아끼고, 작은 아버지들이 알아서 떠들어대는 폭언의 가부장 체제.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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