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표 언론인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이 드러났고,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가 무산되었다. 야당은 국정원의 개혁을 주창하면서 거리로 나섰고, 국정원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지난 6월21일 시작되어 주말마다 열리고 있다. 국정원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국선언과 대학교수들의 성명이 줄을 잇고 있다.
야당의 장외투쟁은 국정원의 개혁 문제가 제도 정치권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찰이 원세훈 당시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개입을 한 사실을 밝혀내어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개혁의 열쇠를 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에 대해 이른바 ‘셀프 개혁’을 지시함으로써, 사실상의 ‘무개혁’ 상태를 묵인한 셈이다.
여야 합의로 성사된 국정조사도 ‘조사’ 한번 못하고 끝날 처지가 되었다. ‘음지’에서 일하는 것을 긍지로 삼아야 할 국정원이 스스로 정치 전면에 나서 엔엘엘(NLL) 논란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국정원의 고삐를 틀어쥐어야 할 정치권이 거꾸로 국정원에 의해 뒤흔들리는 처지로 떨어진 것이다.
야당 의원들이 거리에 나섬으로써 이제 정치는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길거리 민주주의’와 이에 맞서는 ‘공권력’의 대립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언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정원 대선 개입사태의 전모를 팩트 중심으로 소상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언론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팩트는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국민과 함께 대통령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선 개입의 책임을 어느 선까지 물을 것이냐를 가리는 일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언론은 우선 이번 국정조사, 특히 문책 범위에 대해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도록 보도의 초점을 여기에 맞췄어야 했다. 하지만 언론이 집중적으로 보도해 온 것은 국정조사가 아니라 국정조사의 대상인 국정원이 시작한 엔엘엘 논란이었다.
이런 경향은 일부 지식인들과 인터넷 세대인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조·중·동 등 보수적 거대 신문들과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에서 더욱 심했다. 예를 들어 <한국방송>(KBS)은 지난 한 주일 동안 저녁 9시 뉴스에서 국정조사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다가 민주당이 장외투쟁을 선언한 지난 31일에야 이 사실과 함께 장외투쟁이 ‘국정조사 자폭행위’라는 새누리당의 비판을 같은 비중으로 보도했다.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오는 정치의 왜곡은 참으로 심각하다. 국정원이 지난 대선 때 불법 정치개입을 한 사실과 엔엘엘 논란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설사 국정원의 주장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고 해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언론은 이 두 문제를 뒤섞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엔엘엘 논란 속에 대선 개입 문제를 파묻어 버린 꼴이 되었다.
정치권은 정치적 난제를 스스로 풀어나가기 위해 외부로부터 국민여론이라는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국정원 개혁도 마찬가지다. 결국 언론이 여론이라는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야당은 이 문제를 거리로 들고나왔다. 이들이 거리로 나온 것을 비판하는 언론은 먼저 이들을 다시 국회로 돌려보내기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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