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가운데)과 문영희 동아투위 전 위원장(오른쪽),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3일 오전 서울 태평로 한언론회관 전국언론노동조합 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동아일보 대해부>, <조선일보 대해부>(각 5권) 등의 출판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자유언론’ 40주년 맞아 10권 출간
1919년 3·1 만세운동이 있고 이듬해 3, 4월 나란히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맨얼굴을 드러낸 ‘보고서’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조선과 동아의 기사와 사설 등 ‘원자료’를 바탕으로 했고 10권 분량으로 100년 가까운 역사를 정리했다. 일제 및 독재권력과의 유착 등 두 신문의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 언론사 연구에 의미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책은 <동아일보 대해부>와 <조선일보 대해부>(각 5권)라는 이름으로, 올해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을 맞아 펴낸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대를 담은 6권도 나올 예정이다. 김종철·문영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현·전 위원장이 기획 및 집필을 맡았고, 동아 노조위원장 출신인 김광원 전 <문화일보> 기자와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힘을 보탰다. 안중근평화연구원 펴냄, 각권 2만5000원.
일제땐 일왕 찬양·전쟁 선동
조선, 일왕을 “성상폐하” 칭하고
동아, 일장기 말소한 기자 해고 ■ 조선, “성상 폐하의 신민” 조선일보는 비록 ‘대정실업친목회’라는 친일단체의 간부 예종석 등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1920년 창간을 주도했지만, 독립운동가인 신석우가 경영권을 인수한 뒤 민족지의 성격을 띤 바 있다.
하지만, 1933년 4월 당시 광산 갑부였던 방응모가 이를 인수하면서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1936년 조선 총독 우가키 카즈시게의 ‘연두사’를 싣기도 하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엔 노골적으로 전쟁 선동에 앞장선다. 1938년 1월 지원병 제도와 관련한 사설에서 “이는 내선일체의 일(一) 현현(現顯)”이라며 “무릇 국민에게는 납세, 교육, 국방의 의무가 있는데 조선인에게는 납세의 의무만 있었다. 이번 발표로 조선인도 점차 3대 의무를 다하게 될 터”라고 일제를 옹호했다. 같은 해 4월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맞아 그를 위한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사설에서 일왕을 “성상 폐하”라고 칭했으며, “어(御) 탄신을 봉축하는 신민의 감격과 경행은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고 했다.
동아는 초대 사장을 친일파 거두였던 박영효가 맡았고,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성전’이라 칭하며 앞장선 것은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 동아가 지금도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을 자신의 자랑스런 역사로 자랑하지만,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책은 보여준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 시상대에 올라간 모습에서 가슴 위 일장기를 지워 신문에 실은 사건인데, 이는 당시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한 일이다. 동아는 이보다 보름 늦게 사진을 실었고, 더구나 당시 일장기 말소를 주도했던 기자를 해고하기까지 한다.
■ 일제에 이어 군사독재 정권에 ‘충성’
조선과 동아는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테타 때 ‘본색’을 다시 드러낸다. 조선은 같은해 5월19일부터 30일까지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의 완수를 위하여’, ‘혁명의 완수와 국내외의 기대’ 등의 제목으로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사설을 12편이나 실었다. 같은해 6월28, 29일치와 7월1일치엔 ‘지도자도(道)-혁명 과정에 처하여’ 라는 제목의 박정희 기고문을 실었다.
군사독재정권엔 충성 경쟁
5·16 쿠데타 5월 19일~30일
조선일보 12편이나 찬양사설
동아는 전두환을 국민영웅 대접 동아도 당시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설 등을 실었지만, 온도차가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비판하는 기사가 조금씩이나마 실렸고 이는 1960~70년대 ‘야당지 동아’라는 명성을 낳았다. 그 절정이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백지광고사태였다. 하지만, 이는 이듬해 동아 소속 130여명의 기자·피디·아나운서 해고로 이어졌다. 조선은 박정희 국장이 치뤄진 1979년 11월3일 언론사상 유례없는 ‘경어체’ 사설을 내보낸다. 이 사설의 마지막 문장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 고이 가십시오”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조선은 1980년 8월23일치 신문의 3면을 털어 ‘인간 전두환’ 특집기사를 실었다. 조선은 여기서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책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선일보가 일반인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아카이브 자료에서 이 지면을 삭제해 국회도서관에서 겨우 문제의 지면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동아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음날인 1980년 8월27일치 1면에 “새 시대의 기수”, “우국충정의 30년” 같은 표현으로 전두환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했다. 필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조선과 동아를 “반민족지이며 권력·폭력 언론”이라고 결론내렸다. ‘1등 신문’, ‘민족 신문’이라는 조선 동아의 자평에 대해선 “불의와 부정으로 물든 권력과 공생하는 데만 1등 신문”이라고 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조선, 일왕을 “성상폐하” 칭하고
동아, 일장기 말소한 기자 해고 ■ 조선, “성상 폐하의 신민” 조선일보는 비록 ‘대정실업친목회’라는 친일단체의 간부 예종석 등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1920년 창간을 주도했지만, 독립운동가인 신석우가 경영권을 인수한 뒤 민족지의 성격을 띤 바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940년 1월1일치 신년호 1면. 조선(위)은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리고, 용 그림을 그려넣었다. ‘황기 2600년’을 새기고,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도 같이 실었다. 같은 날 정복의 일왕 사진을 게재한 동아보다 한층 심한 태도다.
5·16 쿠데타 5월 19일~30일
조선일보 12편이나 찬양사설
동아는 전두환을 국민영웅 대접 동아도 당시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설 등을 실었지만, 온도차가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비판하는 기사가 조금씩이나마 실렸고 이는 1960~70년대 ‘야당지 동아’라는 명성을 낳았다. 그 절정이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백지광고사태였다. 하지만, 이는 이듬해 동아 소속 130여명의 기자·피디·아나운서 해고로 이어졌다. 조선은 박정희 국장이 치뤄진 1979년 11월3일 언론사상 유례없는 ‘경어체’ 사설을 내보낸다. 이 사설의 마지막 문장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 고이 가십시오”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조선은 1980년 8월23일치 신문의 3면을 털어 ‘인간 전두환’ 특집기사를 실었다. 조선은 여기서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책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선일보가 일반인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아카이브 자료에서 이 지면을 삭제해 국회도서관에서 겨우 문제의 지면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동아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음날인 1980년 8월27일치 1면에 “새 시대의 기수”, “우국충정의 30년” 같은 표현으로 전두환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했다. 필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조선과 동아를 “반민족지이며 권력·폭력 언론”이라고 결론내렸다. ‘1등 신문’, ‘민족 신문’이라는 조선 동아의 자평에 대해선 “불의와 부정으로 물든 권력과 공생하는 데만 1등 신문”이라고 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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