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취재원 공개 거부 ‘비닉권’
87년 언론기본법 폐지때 없어져
세계일보 기자 “감옥에 갈 각오”
미국·독일 등 선진국에선 명문화
전문가 “기준 마련 논의할 필요”
87년 언론기본법 폐지때 없어져
세계일보 기자 “감옥에 갈 각오”
미국·독일 등 선진국에선 명문화
전문가 “기준 마련 논의할 필요”
‘정윤회 국정 개입 문건’ 보도와 관련해 ‘비닉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질 조짐이다. 비닉권(秘匿權)은 언론이 취재원 보호를 위해 3자에게 이를 공개하지 않거나, 압수수색 등의 수사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세계일보>는 지난달 28일 “정윤회 ‘국정개입’은 사실”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이번 사건 보도의 방아쇠를 당겼다. 특히, 이 신문은 청와대가 작성한 감찰보고서를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국기문란’이라 했지만, 세계일보는 취재원의 정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세계일보 보도 뒤, 청와대 비서관·행정관 8명은 해당 기사를 보도한 기자 등 6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재판이 열리면 취재원 보호를 주장하는 세계일보 쪽과 공개를 요구하는 검찰 사이에 대립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사를 쓴 이 신문의 조현일 기자는 1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검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지만 취재원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며 “취재원 보호의 원칙을 깨지 않겠다. 취재원을 밝히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검찰은 서울경찰청 정보분실 소속 경찰관이 문제의 문건을 이 신문 쪽에 전달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선 취재원을 밝히지 않아 기자가 구속되거나 언론사가 불이익을 받은 전례는 아직 없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언론사 압수수색은 여러 차례 시도됐다. 1989년 검찰은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과 관련해 수사관 800명을 동원해 <한겨레>를 압수수색했고, 2009년엔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보도한 <문화방송>(MBC)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한 바 있다.
문제는 재판에서다. 명예훼손 등 민사·형사소송이 진행될 때, 언론의 자유가 발달한 일부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해당 언론이 취재원 보호를 주장할 명문화된 법규정이 없다. 미국은 건국 초기인 1896년 메릴랜드주에서 ‘방패법’(Shield law)이라는 취재원 보호법을 처음으로 제정했고, 현재 35개주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도 언론이 취재원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증언거부권’을 독일기본법(우리의 헌법에 해당)과 민사·형사소송법에서 인정하고 있다.
물론 비닉권이 무작정 보장되진 않는다. 비닉권을 인정하는 나라에서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이나 기본적인 인권과 관련될 경우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2005년 미국의 ‘리크 게이트’가 대표적이다. 당시 미 중앙정보부(CIA) 비밀요원의 신분을 노출한 <타임>과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취재원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이 내려졌고, 이를 거부한 뉴욕타임스의 주디스 밀러 기자가 구속됐다. 당시 밀러 기자는 법정에서 “취재원과의 신분 비공개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언론은 제구실을 할 수 없다.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옥에 갈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명문화된 ‘기준’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에선 과거 언론기본법에 취재원 비닉권 조항이 따로 있었지만, 1987년 이 법이 폐지되면서 지금은 법적 공백 상태로 남아있다. 언론법을 연구하는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헌법이 보장한 언론 자유의 권리에는 비닉권이 포함돼있는 것으로 봐야하지만, 하위 법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없다”며 “지금은 기자들이 처벌을 각오하고 취재원을 보호해야하는 상황이다.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권력에 대한 감시는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결국 익명의 내부고발자로부터 시작된다”며 “취재원이 곧바로 드러나는 상황이라면 누가 제보를 하겠는가. 비닉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중론도 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박경신 교수는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폐지 등 관련법을 국제기준에 맞춰나간 뒤 비닉권 도입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며 “현재 한국에선 무분별한 익명 보도도 문제”라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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