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가이드라인 참고해 편성규약 개정”
보도국 간부들이 기자협회장의 발언을 ‘편집권 침해’로 규정하고, 노사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공정방송위원회’가 연기되는 등 <한국방송>(KBS) 내부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사내 제도와 관련한 갈등이 잇따라 불거지고 있다. 고대영 사장이 취임 전부터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현행 편성규약을 개정해 영국 <비비시>(BBC) 수준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여러차례 공언한 바 있어, 이런 갈등이 앞으로 추진될 편성규약 개정의 방향과 어떻게 연결될지 관심이 쏠린다.
지난해 인사청문회때 수차례 언급
제작 자율성보다 게이트키핑 강조
BBC 앞세워 노조 배제 우려 고 사장, 취임 뒤 공방위 회의 거부
노조 “공정방송 의지 없다” 비판
현행 한국방송 편성규약은 방송의 독립을 지키고 취재·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방송법(제4조)에 근거하고 있다. 티브이·라디오·보도 등 본부별로 편성위원회를 두고, 방송의 공정성·공익성을 훼손하거나 제작 자율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사항 등을 논의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본부별 편성위원회에서 조정이나 해결이 되지 않는 사안은 ‘전체 편성위원회’의 역할을 하는 노사 공동의 공정방송위원회(공방위)에서 논의한다.
그러나 지난해 6월부터 공방위는 파행을 거듭해왔고, 최근 고대영 사장이 취임한 뒤 처음으로 열렸어야 할 공방위 역시 회사의 거부로 연기됐다.
이에 대해 한국방송 양대노조는 지난달 22일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의지가 없다”며 회사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특히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는 “고 사장이 내세웠던 ‘편성규약 정비’가 데스킹 강화를 통한 제작 자율성 약화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앞선 12월17일 이병도 기자협회장의 편집회의 발언에 대해 보도국 간부들이 ‘편집권 침해’라며 문제삼았던 일에 비춰 볼 때, 고 사장이 추진할 편성규약 개정이 기존 제도를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특히 고 사장은 영국 비비시의 ‘편집 가이드라인’(비비시 가이드라인)을 대체 모델로 강조했는데, 이를 앞세워 ‘내부 지휘 체계 강화’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 사장은 지난 11월 인사청문회에서 “영국 비비시의 관리 체계는 사장 및 치프 에디터(보도국장)로부터 시작된다. 노조는 방송사 제작 지휘 체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비비시도 (편성규약 등과 관련해) 노조와 합의하지 않는다”고 말해, 노조 참여에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친 바 있다. 또 “게이트키핑은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취재 기자와 피디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비시의 ‘카운슬링’(상급자와의 협의) 시스템과 비슷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며 게이트키핑 강화 의지를 드러냈다.
비비시 가이드라인은 정확성, 불편부당성, 공정성 등 비비시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지침들을 담은 매뉴얼이다. 공개적인 의견 수렴을 통해 내용이 제정·개정되며, 비비시 의결기관인 ‘비비시 트러스트’가 이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진다. 내용을 보면, 콘텐츠 제작 단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정보의 출처가 하나뿐이거나 출처가 불명확할 경우 실무자로 하여금 책임자 또는 법률 전문가와 의무적으로 상의를 하도록 규정하는 식이다.
정준희 박사(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는 “비비시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내부 저널리스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들의 교육을 강화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등 조직 전체의 책임의식을 높인 것”이라며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데스크의 일방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비비시 가이드라인과 한국방송 편성규약은 그 취지와 시스템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1대1’로 비교해 대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재호 한국방송 새노조 위원장은 “방송의 독립을 목표로 삼는 한국방송 편성규약과 공정성 등의 가치 구현을 목표로 삼는 비비시 가이드라인은 서로 다른 시스템이다.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쓰면, 기존 편성규약으로 담보하려 했던 방송의 독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실무자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단체인 노조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안팎의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을 막기 위한 견제 장치를 없앨 우려가 있다고도 지적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제작 자율성보다 게이트키핑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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