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로이대응모임, 문화연대, 뮤지션유니온 등 단체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예술계의 불공정 관행 개선을 위한 공동행동을 해나갈 것을 선포하고 있다. 2016.3.16 연합뉴스
방송작가들, 노동조합 설립…계약서도 없는 노동인권 실태 공개
음악 창작자들, 문화예술·시민단체들과 함께 불공정 업체 고발
음악 창작자들, 문화예술·시민단체들과 함께 불공정 업체 고발
이른바 ‘열정페이’ 현상이 심각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됐던 문화예술인, 방송작가들이 스스로 ‘권리 찾기’에 나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방송작가들의 모임인 ‘방송작가 유니언’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송작가들이 고용불안, 저임금, 인권침해 환경 등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 ▶ 관련 기사: ‘자네 방송작가로 일해볼텐가? ‘헐.값.에’’ )이 많았는데, 이번에 647명이 참여한 대규모 실태조사로 그 구체적인 상황이 확인된 것이다.
우선 대다수의 방송작가들이 제대로 된 계약도 없이 불안한 지위로 일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응답자 가운데 68.8%가 ‘구두계약’으로, 24.6%가 ‘노동조건을 모르는 상태로’ 일을 해왔다고 밝혔다. 서면계약을 맺었다는 비율은 6.6%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정한 ‘방송영상 프로그램 제작 스태프 표준계약서’의 내용을 반영한 경우는 드물었다. 고용해지 사유를 보면, ‘프로그램 개편·제작 중단·방송시간 축소·시청률 하락·제작비 축소’ 등이 46.3%, ‘담당피디와의 불화 및 담당피디의 메인작가 교체’가 13.9%, ‘일방적인 통보’가 12.1% 등 제작 과정에서 불합리한 관행에 의해 고용이 해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급여의 경우 보통 프로그램 회당으로 지급받는데, 월 평균 급여가 150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가 49.9%로 절반에 달했다. 직급별 시간당 임금을 계산해보니, 메인작가의 경우 1만1106원, 서브작가는 6801원, 막내작가는 최저임금(6030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3880원 정도로 나타났다. 제작이 중단되거나 결방됐을 경우 급여를 받은 적이 없거나 받지 못한 적이 더 많다는 응답이 72.9%에 달했고, 체불 경험도 46%로 나타났다. 4대 보험의 직장 가입률은 1~2%에 그쳤다. 인격무시 발언(82.8%), 욕설(58.4%), 폭행(3.2%), 성폭력(41.1%), 사적인 지시(76.9%), 계약 내용 이외의 업무 지시(68.2%)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 실태도 드러났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81.1%에 달했다는 점이다. 이번 실태조사를 계기로 ‘방송작가 유니언’이 만들어졌는데, 100여명이 온라인 카페( cafe.naver.com/mediawriterunion )에 가입하는 등 참여 열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페이스북 등으로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중계하자, “조선 시대에도 노비 문서가 있었는데, 방송작가는 근로계약서도 없는 현실이 서럽다” 등의 댓글이 여럿 달리기도 했다. 방송작가 유니언은 “앞으로 노동상담, ‘블랙리스트’ 회사 공유, 제도를 개선할 정책 개발 및 입법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고 밝혔다.
음악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창작자들도 불공정 관행 개선을 위한 공동행동에 나섰다. 로이 대응모임과 문화연대, 뮤지션유니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예술인소셜유니온,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등 문화예술 단체와 시민단체 등은 이날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예술 창작분야에서 부당한 ‘저작권 가로채기’ 실태를 고발하며 계약 관행 개선을 요구했다.
이번 공동행동은 방송음악 제작 과정에서 작곡가들에게 불리한 계약과 노동조건을 폭로해온 ‘로이 대응모임’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방송 배경음악을 공급하는 업체인 로이 엔터테인먼트 소속 작곡가였던 이들은 “회사가 작곡가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으며 저작권을 영구히 회사에 양도하라는 계약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며 저작권 침해 실태를 알린 뒤 계약이 해지됐다. 회견에서 로이 작곡가였던 김인영씨는 “5년 동안 배경음악을 만들면서 월 30만원 정도를 받다가 퇴직 즈음엔 80만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방송 자막에 이름 한줄 나오지 않은 것이 슬펐다”고 털어놓으며 “음악 중개업자가 저작권료 60%를 가져가는 관행에 맞서 싸우다보니 로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나도원 예술인소셜유니언 공동위원장도 “지난 10년 동안 음악산업이 10배 성장했다는데 음악 노동자들 대부분은 그림자 노동, 그림자 창작만을 하고 있다. 공정한 분배를 요구한다”고 했다.
젊고 이름없는 창작자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저작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관행은 음악 분야만의 일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소설 <소수의견>을 쓴 손아람 작가는 “문화예술 창작자들이 1년에 1천만원을 벌지 못하고 그나마 그중 절반이 부업으로 버는 돈이라는 현실은 문화예술산업 성장의 열매를 창작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고 있는 탓이 크다”고 했다. 지난 3일 발표된 ‘2015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예술인의 69.3%가 계약 없이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계약 체결 경험이 있는 예술인 가운데 12.2%는 부당한 계약 체결에 따른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이들은 불공정관행 개선을 위한 첫번째 행동으로 저작권법 위반, 불공정 거래, 탈세, 노동법 위반 등으로 로이 엔터테인먼트를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노동청 등에 고발, 신고했다.
최원형, 남은주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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