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헌법재판소의 ‘김영란법’ 합헌 판결에 대해 한국기자협회가 유감의 뜻을 밝혀 욕을 많이 먹었다. 언론의 감시대상인 정부가 언론인 처벌권한을 갖는 것이 언론자유에 어긋나고 그만큼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자율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자유가 법적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반적 결과다. 요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접대 경험 고백 또는 ‘구악’(舊惡) 선배들의 무용담(?)이 기자들의 자성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기자가 접대를 받는 것은 언론자유 덕분이다. 언론자유는 기자에게 스스로의 판단으로 기사를 쓰고 그것을 편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취재원들은 이 힘을 빌리기 위해 기자들에게 밥과 술을 사고, 편의를 봐주고, 공짜 여행을 보낸다. 언론자유가, 즉 기사 작성과 편집의 자의성이 기자 자신을 위해 잘못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기자 집단은 저널리즘 윤리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윤리 준칙은 유명무실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강한 권력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로서 자의적 기사 작성과 편집의 활용이다. 기자들은 필요한 경우 강하게 “조지고”, 또 다른 경우 최대한 “분칠해주면서” 근성이 센 자신들을 정치경제 권력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공정성과 객관성 준칙을 넘어서는 자의성은 외부와의 역학관계에서 상대적 협상력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자의적 힘은 연고주의와 연결된다.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 혈연·지연·학연 등 1차 집단의 연고가 있다면 기자의 언론자유는 해당 취재원을 위해 쓰인다. 그 취재원도 자신이 지닌 정보와 혜택을 기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릴 것이다. 검찰에 특정 대학 법대 출신 기자들이 많이 배치되는 것은 검찰 내에 그 대학 출신 검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연고 있는 기자와 취재원들은 밥과 술을 나누며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재확인한다. 연고가 없는 취재원이라면 기자에게 더 비싼 밥과 술과 호의를 동원해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때로는 객관적 관계에 머뭇거리게 하는 이성은 잠시 접어둔 채 원초적 경험을 함께 나누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1차 집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업과 기관이 광고에 돈을 써서 얻는 효과에 비하면 기자들에게 써서 기사로 만든 홍보 내용이 훨씬 저렴하고 효과도 크다. “우린 소액 매수 가능자들”이라고 자조하는 기자들도 있다. 김영란법으로 기자 개인에 대한 접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다른 방식, 특히 광고나 협찬을 통한 취재원과의 유착이 더 강해질 것이다. 기업과 기관들이 접대비용을 광고비로 돌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네이티브 광고’ 등 기사체 광고나, 겉보기엔 멀쩡한 일반 기사이지만 뒤에서는 돈을 받고 쓴 ‘눈속임 기사’가 늘어날 것이다. ‘뉴스 제작과 영업의 분리’라는 저널리즘 원칙은 더욱 무시될 것이다. 이것은 “기자 개인들이 작게 먹느냐, 아니면 언론사가 크게 먹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기자들은 냉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2차 집단’ 고급 취재원에게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게 됐다. 회사가 취재비도 제대로 대주지 않을 것인데 더치페이로, 또는 오히려 밥을 사면서 취재원을 만나야 한다. 기사인지 광고인지 모를 기사도 써야 한다. 출입처에 광고도 청탁해야 한다. 디지털화와 무한경쟁으로 가뜩이나 업무 조건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들은 더욱 힘들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영업에 동원될 것이다. 선배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은 갔다. 이제 기자들의 인권과 노동 조건에 관심을 둘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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