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주주’ 재일한국인 2세 정강헌씨
지난해 11월19일 일본 사이타마현 오케가와에서 열린 ‘한-일 시민의 합창’ 무대에서 한겨레 평화의나무합창단의 공연곡 ‘담쟁이’를 시로 낭독하고 있는 정강헌씨.
동포 운영 영세회사서 35년 근무
“비참·낙담할 때 ‘한겨레’ 보며 기운” 재일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부친 회고록 연재 때 ‘신문 배달부’로
“광화문광장에서 함께 합창하고파” “아버지의 회고록을 ‘한겨레’에 연재할 때 ‘신문 배달부’가 바로 나였어요. 아버지께서 연필로 공책에 쓰신 원고를 이웃에 살던 젊은 자원봉사자가 노트북에 입력해서 팩스로 주고받으며 수정해서 ‘한겨레’에 보냈어요. 그렇게 해서 ‘한겨레’에 실리면 내가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편집된 내용을 내려받아 출력해서 아버지께 팩스로 보내 확인하고…, 그때는 회사에 다닐 때여서 나름 바빴지만 보람도 컸습니다.” 1년6개월에 걸쳐 연재기사를 ‘배달’하면서 ‘한겨레’에 한층 더 애정을 지니게 된 그는 2011년 11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일본시민합창제 ‘우타고에전국제전’에 한겨레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2시간 넘는 거리였지만 기꺼이 관람을 하러 갔다. “우리 재일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임진강’과 ‘아리랑’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어요.” 그날 공연 직후 즉석에서 두 나라 합창단원들의 통역을 도와준 인연으로 그는 평화의나무합창단의 명예단원이 됐다. 또 이후 해마다 이어지고 있는 평화의나무와 사이타마 우타고에합창단의 교류를 지원해주고 있다. 그는 1954년 요코하마에서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단지 한국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일본 회사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부동산업과 금융업을 하는 재일동포의 영세 회사에 다녔는데, 채권 회수를 둘러싸고 조폭한테 협박을 당하며 비참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죠. 그럴 때일수록 한국이 더 그리웠지요.” 초등학교 입학 전 몇달간 서울 원서동에서 살았던 그는 69년 중3 여름방학을 보냈던 추억을 늘 품고 있었다고 했다. “70~80년대 여권도 받기 어려운데다 유신독재가 무서워 한국에 갈 생각도 못했어요. 와세다대 동창생(최연숙)을 비롯해서 사형수 이철씨 등등 서울에 유학 갔다가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고초를 겪는 동포 친구들을 여럿 지켜봤으니까요.” 그 역시 87년 6월항쟁의 설렘과 뒤이은 대선 패배로 낙담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한겨레’ 창간을 보면서 다시 민주화의 기대를 품고 기운을 냈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호를 받아본 감동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일상적으로 읽게 된 것은 2002~03년 들어 ‘인터넷 한겨레’를 통해서 가능해졌지요. 독학으로 배워 서툰 한국말 공부도 하는 재미에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그 자신은 어렵고 서툴다고 겸손해하지만, 그는 2014년 35년 만에 회사에서 은퇴한 뒤 한반도 통일 관련 문화단체에서 일할 정도로 한·일어 통역과 번역에 익숙하다. “아베 정권 아래 많은 일본 언론은 권력의 시녀가 돼버렸습니다. 진보 언론을 표방한 곳은 있지만 권력을 몰아낼 만큼의 언론은 없습니다. 일본에는 ‘한겨레’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는 우리 재일한국인의 자랑입니다. 앞으로도 권력에 지지 않고 재외동포까지 아울러 국민들이 바라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겨레’가 중요한 노릇을 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부친을 닮아 노래를 좋아하는 정씨는 “평화의나무합창단원들과 함께 광화문 촛불광장에서 ‘인간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고 새해 소망을 전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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