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재(67)씨는 최근 <한겨레> 주주가 됐다. ‘새주주 모집’ 광고를 보고 망설임 없이 <한겨레> 주식 1000주를 샀다.
이씨는 대전에서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젊은 시절 그는 가난한 농부였다. 전남 함평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 시절 그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농촌 현실에 분노했다. 농민 운동에 참여해 ‘쌀값 보장 투쟁’에 나서곤 했다. 1988년 <한겨레> 창간은 그에게 하나의 ‘희망’이었다. 창간 주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돈 1000원이 어려운 때였다.
지난 18일 대전 중구 선화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한겨레> 창간 때 주식을 사지 못한 게 사는 동안 한이 됐다. 늘 <한겨레> 가족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지난해 신문에 난 주주모집 광고를 보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주식을 사면서 정말 흐뭇했다”고 말했다.
그는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한겨레>를 구독하고 있다. 1990년 함평 생활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와 사업을 시작할 때도 <한겨레>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빚낸 돈으로 뛰어든 건축 사업이었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낯선 건축 용어를 익히며 정신없이 살았다. 바빴지만 틈틈이 읽은 <한겨레>는 그에게 이웃과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어릴 때 할머니 손에 자라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숙부 밑에서 농사를 시작했어요. 가방끈 짧은 내게 <한겨레>는 고마운 존재였죠. 얼마나 좋은 글이 많았는지…. 나의 의식과 정신은 이 신문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아파트 임대업을 하는 이씨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 “아파트 분양 사업과 비교해 돈도 안 되는 임대 사업을 머리 복잡하게 왜 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타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임대 사업이 분양보다 안정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익’을 생각하는 마음도 크다.
“젊은 층이 집을 사는 데 크게 신경 안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서민들은 10년 이상 안 쓰고 모아도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현실이에요. 이러니 우리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젊은 청년들이 싼 월세 내고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해요. 하지만 정부는 임대 아파트 사업에 정책적으로 힘을 안 실어줍니다. 박근혜 정부가 시장에 돈을 많이 풀었지만 대기업에 쏠려 잘 분배되지 않았죠.”
이씨는 지난 2012년 대선 전 <한겨레> 지면을 통해 최태민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처음 알았다.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자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일 난다”는 핀잔을 들었다.
“지금 정권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특히 언론의 책임이 크죠. 그래도 <한겨레>는 다른 언론이 다루지 않은 것을 국민에게 알리려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노력으로 지금이라도 감춰진 사실들이 드러난 것을 저는 신의 축복이라 여겨요. 그 뿌리를 이번에 다 뽑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농촌 문제는 늘 그의 마음을 이끄는 주제다. 농사지을 때 겪은 설움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뼈 빠지게 일해 겨우 광주에 집 한 채 마련했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정부가 장려해 축산업에 뛰어들었는데, 정부가 미국 소를 수입해오는 바람에 다 망했어요. 소 키우라고 축우 자금을 줘놓고 소를 수입해버리니 저 같은 농민은 죽으란 거였죠. 그 일을 계기로 농민 운동에 뛰어들게 됐어요. 여전히 농민의 삶은 어둡습니다. 1차 산업을 잘 다져놓고 2차 산업으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1차 산업을 죽이면서 다른 산업을 키웠어요.”
그는 “북한을 적이 아닌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창고에 쌓인 쌀이 얼마나 많은데 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못 주고 있잖아요. 민족으로 접근하면 다 풀릴 문제인데 적으로만 여기니 풀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세대는 북한을 적으로 봤지만 후세에게는 민족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북한보다 몇십배 잘 사는 우리가 왜 안보를 미국에 책임져 달라고 해야 하나요. 남북을 갈라놓고 화해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미국이잖아요. 앞으로 <한겨레>가 남북문제를 잘 풀이해 보도하길 바랍니다.” 대전/글·사진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