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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디어

최고의 다큐 피디가 아프리카에서 죽어간 이유

등록 2017-07-30 09:32수정 2017-07-30 10:48

[토요판] 뉴스분석 왜? 독립피디들의 죽음
7월14일(현지시각) 박환성·김광일 피디가 사망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베들레헴 국도의 사고현장에서 열흘 뒤인 7월24일 동료들이 노제를 올리고 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7월14일(현지시각) 박환성·김광일 피디가 사망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베들레헴 국도의 사고현장에서 열흘 뒤인 7월24일 동료들이 노제를 올리고 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 지난 7월14일 <한겨레>는 방송사 외주제작비를 둘러싼 독립 다큐멘터리 피디의 싸움을 보도했습니다.([관련기사] ‘독립PD가 받은 정부지원금, 방송사에 일부 떼달라?’) 문제제기에 앞장섰던 박환성 피디가 보도 당일 아프리카에서 함께 작업하던 김광일 피디와 교통사고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동료 독립피디들은 방송사의 ‘갑질’에서 찾으며 분노했습니다. 생전 박환성 피디와 고민을 나눴던 동료 피디가 고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의 원인이 된 불공정거래를 바로잡겠다는 다짐을 담아 글을 썼습니다.

박환성 피디.

그에 대한 기억은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다. 그는 유난히 맥주를 좋아했다. 특정 브랜드의 어떤 맛의 맥주가 아니고, 그냥 맥주라면 다 좋다고 했다. 자연다큐멘터리 전문 피디이다 보니, 그늘 한 뼘 없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지의 땡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래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켜는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길고 힘든 해외 촬영을 마치고 귀국해서도, 곧잘 동료와 선후배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불러 모아 밤늦도록 맥주 마시는 순간을 참으로 좋아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소파에 고꾸라질지라도, 그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일 년의 절반 이상을 야생에서 떠돌던 그가 “맥주 한잔 하자”고 하면 돌아온 것이었고, “다녀와서 맥주 한잔 하자”고 하면 또 떠나는 것이었다. 지난해 이맘때에는, 작업실로 후배들을 불러 “나야 혼자지만 너희들은 처자식도 있고… 많이 먹어라”며 고기를 넉넉히 사다가 직접 구워주기도 했다. 물론 맥주와 함께…. 이제는 맥주병만 봐도 그가 생각날 것이다.

맥주를 좋아하고 후배를 아꼈던 사람

그에게는 그 작업실이 곧 집이었다. 작업실 한켠에 침대를 놓아두고, 일하고 먹고 잤다. 내가 편집 컴퓨터도 없고, 작업실도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던 시절, 어느 해 겨울, 그는 어디론가 또 떠나면서 자신의 작업실 열쇠를 툭 건네주기도 했다.

“나 없는 동안 편하게 써라.”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덕분에 따뜻하게 지냈다.

언젠가 여느 때처럼 맥주를 마시다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형은 왜 동물만 찍어?”

“얘들은 꼼수를 안 부리잖아. 배신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본능에 정직할 뿐… 인간과 달라.”

그는 꼼수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온 독립피디였다. ‘독립피디’, 일반 시민들에게는 낯선 단어일 것이다. 흔히, 외주 피디라 불린다. 방송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 독립 제작사 소속으로 또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우리나라 전체 방송 프로그램의 절반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독립피디다. 박환성 피디는 그중에서도 자연다큐멘터리 전문 피디로 명성이 자자했고, 2017년 10월 방송 예정인 〈EBS 다큐프라임 야수와 방주〉의 제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촬영 중이었다.

7월14일 EBS 자연다큐 촬영 중
박환성·김광일 아프리카서 사고
졸음운전 차량과 정면충돌 즉사
뒷좌석엔 뜯지도 못한 햄버거
동료들 ‘제작비 넉넉했다면’ 비통

자연다큐 독보적 독립피디 죽음엔
20년 전보다 줄어든 외주제작비
박 피디, 어렵게 확보한 정부지원금
‘EBS가 40% 요구’ 출국 전 폭로
독립피디들, 비대위 결성 ‘갑질’ 대응

그의 곁에는 후배인 김광일 피디가 함께 있었고, 그들은 지난 7월14일 밤 9시께, 지구 반대편 낯선 허허벌판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이동하던 중 졸음운전으로 추정되는 상대편 차량과 정면충돌했고,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의 죽음이 한국의 독립피디 동료들과 가족들에게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4일 후. 믿기지 않는 소식에 모두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유가족과 동료들은 서둘러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사고 현장에는 그들이 탔던 차량이 휴지처럼 구겨져 있었고, 뒷좌석에서는 뜯지도 못한 햄버거와 마시다 만 콜라병이 발견되었다. 아, 지난해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의 가방에서 발견된 컵라면이 떠오른 건 왜일까. 가슴이 찢어진다.

20여년 전에는 방송사의 외주프로그램 담당 부서의 이름이 ‘외주제작국(부)’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전담 부서를 없애고 프로그램 단위로 별도 관리하거나, 부서 이름에서 ‘외주’라는 단어를 빼고 ‘콘텐츠협력국’ 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협력’은 허울일 뿐,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심지어 최저임금도 4배 이상 오른 지금, 방송사가 독립제작사나 독립피디에게 지급하는 제작비는 오히려 20년 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동안의 물가인상률과 사회경제 규모의 확대를 감안하면 그 감소폭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해마다 줄어드는 제작비로 똑같은 품질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어려운 일이 가능한 이유는 제작인력 축소와 이에 비례해서 가혹해지는 노동강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특히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교양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촬영의 경우 연출, 조연출, 촬영감독, 촬영보조 등 최소한 3~4명이 공동으로 작업하던 것을 이제는 연출자인 피디가 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른 새벽 직접 차량을 운전해서 이동하고, 출연자와 인사하고, 현장을 제대로 파악할 사이도 없이 카메라를 돌리고, 드론을 날리고, 다시 밤길을 운전해서 돌아와서는, 밤새워 편집을 하는 일이 다반사다. 매일, 매순간 제작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기계처럼 혹사시켜야 하는 것이다.

방송사가 충분히 제작비를 지급하지 못할 사정이라면 최소한 방송광고, 브이오디(VOD) 서비스, 재판매 등으로 발생한 수익의 일부라도 공유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방송사들은 촬영 원본에 대한 소유권마저 가져가 버리니, 독립 제작사나 독립피디가 이를 활용하여 제2의 콘텐츠를 만들어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독립’피디라는 말이 참으로 무색하다. 독립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 생사여탈권을 쥔 갑에 철저히 종속된 저임금 하청노동자인 것이 현실이다.

박환성·김광일 피디가 탄 차량(오른쪽)이 마주 보고 달려오는 고속의 차량(왼쪽)에 부딪혀 완파됐다. 남편이 탔던 승용차 옆에서 비통해하는 고 김광일 피디의 부인.  한국독립피디협회
박환성·김광일 피디가 탄 차량(오른쪽)이 마주 보고 달려오는 고속의 차량(왼쪽)에 부딪혀 완파됐다. 남편이 탔던 승용차 옆에서 비통해하는 고 김광일 피디의 부인. 한국독립피디협회
사고 차량에서 발견된 박환성·김광일 피디의 유품.  한국독립피디협회
사고 차량에서 발견된 박환성·김광일 피디의 유품. 한국독립피디협회
고 박환성 피디. 그는 멀쩡하게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미국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늦은 나이에 독립피디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후 줄곧 자연과 동물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장르에서, 그는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힘들 만큼 독보적이었다. 그의 작품은 방송사의 입장에서도 희귀 아이템이었을 뿐만 아니라, 털털한 웃음 뒤에 감춰진 깐깐함과 고집으로 매번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들은 주요 지상파 방송사의 간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누볐고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각종 영화제에도 숱하게 소개되었다. 그는 최고였고, 그래서 다른 독립피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조건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독립피디는 죽어서도 가난하다

그랬던 그도… 멀고 낯선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지에서 가로등도 없는 밤길을 직접 운전해야만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코디네이터, 운전기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촬영감독도 없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야생의 현장을 담아내야 하는 것만도 스트레스와 체력 소모가 극심한 중노동인데, 거기에 더해 아침저녁으로 장거리 운전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이번 촬영을 위해 출국하기 직전까지 방송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방송사가 제시한 제작비로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가 힘겹게 정부지원금을 확보했더니 그중 40%를 방송사가 내놓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협력제작업체상생방안’이란다. 제작사한테 ‘삥’ 뜯어가는 게 상생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듯 ‘관행’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수십년 동안 자행되던 방송사의 갑질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개적으로 나섰다.

‘감히’ 일개 독립피디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방송사를 제소하고,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고, 국회와 변호사를 찾아다녔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앞으로 다시는 방송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고 밥줄이 끊길 것을 알면서도, 출국 전날까지 <한겨레>와 인터뷰(<한겨레> 7월14일치 ▶‘독립PD가 받은 정부지원금, 방송사에 일부 떼달라?’)를 하고 떠났다.

박환성·김광일 피디의 유해가 27일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박환성·김광일 피디의 유해가 27일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국민신문고에 민원 넣을 때, 해당 부처를 미래부로 해야 하나? 방통위로 해야 하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역시 “다녀와서 맥주 한잔 하자”였다. 그날 밤도 숙소에 돌아가서 들이켤 맥주 한잔을 생각하며 고단함을 견디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이 너무도 억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햄버거 한입 베어 물 여유도 없이 밤길을 달려야 했다. 만일 방송사에 정부지원금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제작비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소형 세단이 아니라 튼튼한 스포츠실용차(SUV)를 빌릴 수 있었다면, 그리고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운전기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면, 아예 좀 더 여유로운 일정으로 늦은 밤에는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숙소에서 쉬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지 않을까.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다시는 거기 안 간다, 지긋지긋하다”면서도, 금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음 작품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은 차디찬 햄버거 한 조각도 입에 넣지 못하고,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독립피디는 죽어서도 가난하다. 퇴직금도 없고 국민연금조차 못 내는 이들도 있다. 머나먼 남아공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집으로 모셔 오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데 이를 마련할 방법이 막막했다. 그래서 독립피디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독립피디협회는 급히 사고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모금에 나섰는데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 운구에 필요한 비용이 마련되었다. 동료 독립피디뿐만 아니라 방송산업계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작가는 물론 소식을 접한 일반 시민들까지 모금에 동참했다. ‘을’의 억울한 죽음에 이 땅의 수많은 ‘을들’이 한마음으로 응답한 것이리라. 그래서 유가족과 동료들이 남아공으로 직접 날아가 현장을 확인하고 결국 지난 27일 목요일 오후 고인들의 유해를 모셔 올 수 있었다.

공항에는 고인들의 유가족, 지인, 동료 수십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인들의 유해가 입국장에 들어서자마자 공항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침통함으로 가득했고 유해는 바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로 옮겨졌다.

박환성(왼쪽)·김광일 피디의 유해가 27일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셔졌다.  한국독립피디협회
박환성(왼쪽)·김광일 피디의 유해가 27일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셔졌다. 한국독립피디협회
그들이 남아공으로 떠나기 직전 방송사의 갑질을 용기 있게 폭로한 박환성 피디의 투쟁에 많은 동료들이 함께하기로 결의하였고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최영기 전 한국독립피디협회 회장)를 꾸렸다. 비단 박환성 피디 사건뿐만 아니라 수십년 동안 절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자행되어온 방송사들의 횡포에 맞선 ‘을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 무겁고 힘겨운 첫발을 내딛고 그들은 먼 길을 떠났다. 2017년 7월14일 두 피디가 유명을 달리하던 바로 그날, 박환성 피디가 올린 마지막 페이스북 글이 그의 유서가 되어버렸다.

“갈 데까지 가봅시다. 뭐가 어찌 되는지….”(▶ 박환성 피디 페이스북 글)

30년 동안 독립피디로 살아온 최영기 위원장은 공항에서부터 통곡을 멈추지 못했다. 고인들의 영전에 캔맥주 하나를 올린 후 유가족들에게 다짐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2의 박환성·김광일이 없도록

공영방송 정상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방송사의 갑질은 10년 전, 20년 전부터 만연해 있었다.

그러니 정권이 바뀌었다고 방송사의 갑질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장이 바뀌고 해고자가 복직되어도 그들의 갑질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수많은 독립피디들은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오늘도 도처에 널려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길을 나설 것이다.

미혼이었던 박환성 피디에게는 노부모님이 계시고, 김광일 피디에게도 노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어린 두 자식이 있다.

부디 갑질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길…. 다시는 제2의 박환성 피디, 제2의 김광일 피디가 길 위에서 쓰러지지 않기를….

*한국독립피디협회는 비극적인 사고의 최종적인 수습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모금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한은행 140-009-158111 (예금주: 사단법인 한국독립피디협회)

한경수 독립피디(<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춘이막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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