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은 <문화방송>아나운서, 신동진 아나운서, 허일후 아나운서, 김범도 아나운서(왼쪽부터)가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방송>사옥 인근에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또 한 명의 아나운서가 한 달 전 <문화방송>(MBC)을 떠났다. 2012년 170일 간 파업에 참여했던 김소영 아나운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송에서)배제당했고 떠밀리듯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22일 동기 이재은 아나운서가 밝힌 김 아나운서의 퇴사 배경이다. 한 때 “아나운서 한두명만 나가도 담당 국장자리가 흔들렸다”던 <문화방송>아나운서국이었지만, 최근 5년 간 아나운서들의 퇴사는 반복됐다. 2012년 이후 12명의 아나운서가 회사를 떠났다. 모두 수백∼수천대 1 경쟁률을 뚫고 <문화방송>사원증을 받아 들었을 이들이다. ‘떠밀리듯’ 아나운서들이 퇴사한 것은 회사가 파업에 참여한 이들을 업무에서 배제하면서다. 회사에 남은 아나운서 11명이 5년 새 다른 부서로 전보됐다.
김범도·신동진·손정은·허일후 아나운서의 지난 5년도 부당전보·출연금지의 연속이었다. 김 아나운서는 5년 전 파업 후 경인지사, 용인 드라마 세트장, 신사업 개발센터 등에서 일했다. 신 아나운서는 2012년 파업 이후 사회공헌실, 주조실을 거쳤다. 허 아나운서는 미래전략실, 손 아나운서는 사회공헌실에서 일할 것을 지시받았다. 마이크를 잡지 못한 채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의 ‘암흑기’를 지켜본 네 아나운서에게, 지난 5년은 어땠을까. <한겨레>는 29일 오후 서울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이들을 만났다.
-5년은 긴 시간이다. ‘암흑기’가 끝나지 않을 같은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김범도 아나운서(이하 김) 2015년 초에 ‘저성과자’로 분류됐다. ‘저성과자’ 쉬운해고 관련 법안이 통과된다는 말이 돌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때, 언론인이라는 자각이 용기를 줬다. 방송인으로 바닥을 쳤지만, 언론인으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명으로 나와 우리를 지켰다.
손정은 아나운서(이하 손) 사회공헌실로 발령받고 방송 생각을 버려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 영화 <라라랜드>를 봤는데, 여주인공이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 간절한 모습을 보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대학교 때 어떻게 하면 좋은 아나운서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주인공의 열정이 (방송을 하고자 했던)내 모습과 겹쳐져서 마음이 무너졌다.
허일후 아나운서(이하 허) 오승훈 아나운서가 부당전보 당했을 때 제일 마음 아팠다. 2015년 권성민 피디가 해고된 뒤 오 아나운서는 사내 게시판에 ‘공손하게’ 한 번만 다시 생각해달라는 글을 썼다. 그 뒤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이 친구가 처음엔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가 가까운 동료들이 술자리에서 ‘그러다 화병난다‘며 속에 있는 얘기를 하라고 하자 ‘형님, 저 가기 싫어요’하고 울더라.
신동진 아나운서(이하 신) 어떤 부서에 발령받았을 때, 담당 보직자가 나를 불렀다. 그 보직자가 ‘내가 당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회사가 준 것 같다’고 했다. 그 사람은 솔직하게 얘기한 것이었지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회사에서 감시받는 사람이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남은 사람들 지키자”…행동 나선 아나운서들 “(아나운서)식구를 더는 잃지 말자.” 허 아나운서는 김소영 아나운서가 퇴사한 뒤 동료들 사이 이런 공감대가 생겼다고 했다. 아나운서들은 총회를 열어 지난 18일부터 업무·출연거부에 나서기로 했다. 27명의 아나운서가 동참했다. 회사를 떠난 동료들도 "마음만 함께해서 미안하다"며 응원했다. 투쟁기금을 보내 온 이도 있었다. 지난 22일 기자회견에서 아나운서들은 그간 겪은 부당전보·출연금지 사례를 폭로하고, 김장겸 사장과 신동호 아나운서국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기자회견 중 ‘신동호’가 포털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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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나운서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부담감은 없었나.
손 사실 기자회견 전날 세 시간도 못잤다. 폭로성 발언들을 살면서 해봤겠나. 그날 아침에 눈 떴을 때 하지 말자, 생각도 들었다. 출근 준비하다가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이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거니까, 내가 당한 사례를 내가 얘기해주자고 생각했다.
신 경영진 퇴진 요구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에 아나운서국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여나 이들이 다칠까봐 걱정됐다. (기자회견에서) 표현을 백퍼센트 다 한 건 아니지만, 전에 없던 수위를 이번에 감행해야겠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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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경영진·간부들의 보도통제와 부당노동행위 등을 그린 영화 <공범자들>이 화제다. 아나운서국의 파행을 이끈 ‘공범자’들을 떠올려본다면.
김 김장겸 사장은 기자 출신이면서도 계약직·프리랜서 아나운서를 뽑고, 뉴스를 익명으로 내보내겠다는 발상을 했다. 김 사장의 정책을 따라간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도 동료로서 용서받기 힘든 일을 한 것이다.
허 영화를 보면 거기 사람들(문화방송 경영진) 행태가 (어이 없어서) 웃기다. 관객들이 웃으면서, 심지어 (경영진에게)욕까지 하면서 본다. 우리는 그 모습이 두배 아프게 다가온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생했구나 하면서… 경영진과 전·현 국장이 아나운서국이 무너진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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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업…“이번엔 5년 전과 다를 것” 네 아나운서에게 <문화방송>뉴스를 보느냐고 묻자, “잘 보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뉴스데스크>는 ‘청와데스크’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보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10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아나운서들은 <문화방송>에 대한 애정이 컸다. 손 아나운서는 "신입 때 앵커 멘트를 스스로 고치는 방법을 익히고 공부하라고 선배들한테 배웠다. 내 생각도 얼마든지 반영할 수 있었다”면서 “저마다 ‘내가 주인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조직문화"였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문화방송>의 호시절을 기억하기에, 네 아나운서는 지난 5년을 뒤로 하고 다시 9월 파업을 앞두고 있다.
-이번 파업에 나서며 5년 전과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신 지난 파업에서 ‘벽보고 하는 싸움’ 같다는 한계를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분명히 이기는데 끝나는 시기의 문제일 것이라 본다.
허 메이저리그 야구로 치면 7회쯤 경기 했는데 (경기가 끝나지 않고)점수가 상당히 뒤쳐진 채로 비가 많이 와서 지연된 상황이다. 메이저리그는 이런 ‘레인 딜레이’가 긴 경우가 많다. 그렇게 5년 동안 비가 온 느낌이다. 이제 경기가 재개된다. 남은 이닝은 얼마 없지만 역전승하는, 그런 상황이다.
-파업 이후 방송이 정상화 되면 무엇을 꿈꾸나.
김 아나운서국을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집단으로 만들고 싶다. 기대해주시길 바란다.
신 변창립 아나운서가 계신다. 그 선배가 파업 뒤 심의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퇴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후배들 존경 받는 그 선배가 이대로 회사를 떠나지 않고 마지막 소임을 다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허 아나운서국을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후배들의 교육을 맡고 싶다.
손 해직된 박성호·박성제 기자와 함께 일했는데 저에게는 큰 추억이었다. 이 선배들을 포함한 해직자들이 <문화방송>사옥 로비에 서서 복직 기자회견 하는 날을 항상 꿈꾼다.
허 얼마 전 <와이티엔>(YTN)에서 복직자 출근 뉴스를 내보냈던데, 손 아나운서가 <문화방송> 해직자 출근하면 뉴스를 하면 좋겠다.(웃음)
박준용 김효실 기자
juney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