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선친에게 올리는 아들의 글
2018년 늦가을 어머니 구순 때 낙상으로 휠체어 탄 아버지와 고향집 마당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오른쪽 셋째가 필자 김종선씨이다. 김종선 주주통신원 제공
면사무소 ‘소사’ 이어 군청 공무원
폭풍우 눈보라에도 자전거 출퇴근
두 동생·6남매 대학교육 뒷바라지 ‘주어진 일 최선 다해 배우고 실천’ 아버지(김봉규·1927~2019)는 함평천지라 불리는, 전남 함평의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녔다. 1940년께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할머니와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김영금)는 방 한 칸과 부엌 하나만 달랑 있는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나마 방이 좁아 새 신부는 어쩔 수 없이 밤이면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잠을 구걸해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소사(小使)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물레를 잣거나 베를 짜서 장에 내다 팔거나 닭을 쳐서 살림에 보태었다.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온식구가 근면 절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등은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켤 수 있었고 옷이나 종이는 닳아서 없어지도록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으로 직장을 옮기신 뒤에도 이십 여리나 되는 거리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자전거로 출퇴근하였다. 여름 장마철의 폭풍우와 추운 겨울의 눈보라를 헤치며 집에 돌아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태어났던 향촌은 유교문화를 미풍양속으로 여기던 곳이었다. 한학을 하던 분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을 주위에 산재하여 있던 친족들은 문중의 일원으로 시제를 비롯하여 모든 대소사를 함께 치르며 전통을 받들었다.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이라 종원들은 함께 도와야 살아갈 수 있었다. 없는 물건을 서로 빌려주고 바꿔쓰며 부족함을 이겨냈다. 가문의 명예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자손들을 올바르게 키워내는 힘이기도 하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도 유생(儒生)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 경서(經書)를 읽어본 뒤에야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록 소학교만 다니셨지만, 두 명의 남동생과 여섯 명의 자식을 대학에 보내주셨다. 동생 네 분과 자식 일곱 명(5녀2남)을 가르치고 가정을 이루게 하였으니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는 말로 어찌 그 과정을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부친 김봉규씨는 2018년 낙상으로 다친 이후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이듬해 별세했다. 향년 92.
필자의 모친 김영금씨가 지난해 가을 고추밭 농사를 짓고 있다. 김종선 주주통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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