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표 긴급조치사람들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저한테는 부대에서 투표용지도 주지 않더군요. 그런데도 부대원 100% 투표, 100% 찬성으로 국민투표 결과를 보고했어요. 투표한 부대원 말도 들어보니 중대장이 손바닥으로 투표용지에서 반대표 찍는 공간을 직접 가리고 찬성표를 찍도록 유도했더군요.”
유영표 사단법인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이하 긴급조치사람들) 대표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있던 1972년 11월 21일에 강원 홍천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1968년 서울대 문리대 고고인류학과에 입학한 그는 4학년 때인 1971년 교련 반대 시위 등을 주도하다 그해 5월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두 달 뒤 강제 징집됐다.
꼭 5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종신집권을 꿈꾸며 이른바 ‘10월 유신’을 감행한 독재자 박정희는 모두 9번의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이 중 1975년 5월에 내린 ‘긴조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이와 관련한 보도를 모두 금지시켰다. 철저히 국민기본권을 억압한 이 조치로 1천 명 이상이 구속 피해를 봤는데 이는 긴급조치 전체 구속자(1140명)의 90%나 된다.
4년 전 ‘긴조 9호’ 피해자의 권리를 찾고 한국사회 민주화에도 기여하자는 뜻으로 긴급조치사람들을 결성한 유 대표를 7일 경기 양평 자택에서 만났다. 회원이 300여명인 이 단체는 오는 12일 오후 2시 서울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민청학련동지회(상임대표 장영달)와 함께 ‘유신 50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이름으로 유신 50년 토론회를 연다.
유 대표는 긴조 9호 발동 9일 만인 1975년 5월22일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겸해 일어난 이른바 ‘오둘둘 시위’ 배후 혐의로 구속돼 1년6개월 형을 살았다. 유신 정권의 철통 감시를 뚫고 학생 500여명이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 진출까지 시도한 이 대규모 시위로 학생 300여명이 연행됐고 구속자는 56명이나 나왔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74년 2학기에 복학한 유 대표는 이듬해 4월11일 김상진 열사가 유신 철폐 등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뒤 인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와 문학회, 사범대 야학문제연구회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장례 논의가 일자, 복학생 선배 그룹을 대표해 후배들과 함께 ‘장례 시위’를 조직했다. 장만철(장선우 영화감독), 고 김도연(문학평론가), 김정환(시인) 등을 따로 접촉해 굿과 조시, 조사와 같은 장례 역할 분담을 시키는 등 치밀한 준비로 긴조 9호 시대의 첫 대규모 시위를 성사시킨 것이다.
그는 석방 뒤 한국노총 간부들이 만든 노동문제연구원에서 일하다 <동아일보> 출판국 임시직을 거쳐 1981년부터 18년 동안 <매일경제> 출판부에서 일했다. 2008년부터 3년 동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부이사장도 지냈다.
71년 서울대 교련반대 시위 ‘강제징집’
74년 ‘522 시위’로 ‘긴조 9호’ 위반 구속
2018년 긴조 피해자 300여명 단체 결성
오는 12일 민청학련동지회와 함께
‘유신 50년 한국 민주주의 과제’ 토론
“국가가 피해 배상하고 사과도 해야”
긴급조치사람들이 현재 당면한 최대과제는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190여 명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구제다. 대법원은 지난 8월 긴조 9호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유신 정권의 고도의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는 2015년 박근혜 정부 양승태 대법원의 판단을 바로잡은 것이다. 하지만 7년 전 대법원 판례 탓에 지금껏 소송을 낸 긴급조치 피해자 400여명 중 190여명은 패소가 확정된 상태다. 유 대표는 “현행법으로 (패소자를) 구제할 방법이 없어 우리 단체와 민변이 함께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에서 이탄희·박주민·김의겸 의원이 관심을 갖고 우리와 협력하고 있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당에서도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는 긴급조치사람들을 만든 이유를 두고는 긴조 9호 피해 실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민청학련 등 앞선 긴급조치 피해 사건들은 당시에도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긴조 9호는 보도까지 철저히 통제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요. 또 구속자가 워낙 많아 정확한 피해 집계도 힘들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염병할 세상’이라고 한마디 했다가 구속된 사람들도 꽤 됩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피해 통계에 빠져 있어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주제발표를 하는 오는 12일 토론회에서 유 대표는 인사말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 유신의 폭압을 겪었던 세대의 연대 활동을 제안할 생각이라고 했다. “민청학련동지회와도 논의해 과욕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우리 역할을 찾아보려고요.” 긴급조치사람들이 지난 8월 ‘밀정’ 의혹을 받는 김순호 행정안전부 초대 경찰국장의 경질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앞장선 것도 같은 취지이다.
유신 선포 1년 전 대학 4학년이었던 그는 유신 정권이 몰락한 이듬해인 1980년 10월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군 복무 중 유신 선포를 어떤 마음으로 들었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1972년 박정희가 만 55살이었어요. 앞으로 30~40년도 더 살 텐데 종신 대통령을 한다니 그 긴 지옥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생각했죠.”
긴조 9호 주된 피해자인 72~74학번 후배들에 등 떠밀려 긴급조치사람들 대표를 맡았다는 그는 한국사회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유신과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 정확한 진상 규명을 하고 국가가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제주 4·3 피해자에게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도 사과했잖아요. 또 어려서부터 민주시민 교육이 필요해요. 최근 태극기 부대를 보면 이 사람들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잖아요. 지난 50년 민주주의가 진전했지만, 태극기 시위대와 같은 뒤틀린 생각을 바로잡으려면 가정을 포함해 어려서부터 민주시민 교육이 필요해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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