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경 샌프란시스코 공감 대표. 김낙경 대표 제공
미국 캘리포니아주 도시 샌타클래라에 사는 김낙경 샌프란시스코 공감(이하 공감) 대표가 얼마 전부터 자주 듣는 칭찬이 있다. 한국말이 부쩍 늘었다는 말이다. 5년 전만 해도 ‘집회’란 말을 듣고 ‘다 같이 모여 기도하는 행사’를 떠올렸을 정도로 한국말이 서툴렀다. 지금은 한국어 통역이나 번역도 거뜬하게 한다.
한국어 실력뿐 아니라 그의 삶까지 바꾼 중대한 사건이 5년 전 있었다. 바로 세월호 참사다. 14살이던 1992년 가족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은 김 대표는 2014년까지 한인 사회와 별다른 인연을 맺지 않았다. 대학 졸업 전까지 살았던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도시들에도 한인이 많지 않았다. 2001년 9·11테러 뒤에는 미국 시민권도 땄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테러 현장에서 시민을 구하는 소방관들을 보면서 이런 나라 시민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다 세월호를 만났다. 참사가 있던 날 그는 엔지니어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있었다. “전 국민이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왜 구하러 가지 않고, 구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 뒤로 한국 사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죠.” 지난 23일(현지 시각) 오후 전화로 만난 김 대표 말이다. 그는 2005년부터 스탠퍼드대 교육학과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공감이 지난 9월 팔로 알토 미첼 공원에 설치한 세월호 벤치. 김낙경 대표 제공
벤치에서 쉬는 이들은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문구를 만나게 된다. 김낙경 대표 제공
“9·11 때 뉴욕 소방관들은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 나오라고 했어도 구해야 한다며 올라갔어요. 세월호와는 너무 달랐죠.”
참사 한 달 뒤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한인 200여명이 세월호 추모 집회를 했다. 그가 미시유에스에이 사이트에서 제안해 이뤄졌다. 어눌한 한국어로 직접 사회도 봤단다. 이 집회는 세월호 3주기까지 매달 한 번씩 진행됐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단체는 2016년 초 ‘샌프란시스코 공감’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난 7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비영리단체로 정식 등록도 했다.
“2015년 말 위안부 졸속합의 때 우리 단체 많은 분이 항의 시위에 참여했어요. 이걸 계기로 위안부나 남북 평화 이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죠. 회원 공모로 투표까지 해 ‘공감’으로 바꿨어요. 세월호 이름으로 다른 활동을 하면 유가족들에게 안 좋은 시선이 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단체 영어 이름은 ‘원 하트 포 저스티스(One Heart For Justice)’입니다.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한 마음으로 정의를 외치자는 뜻을 담았죠.”
비영리단체 등록이 늦춰진 이유를 물었다. “애초 설립 목적인 세월호 진상 규명이 잘 돼 우리 단체가 빨리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번 등록에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다지자는 뜻도 있단다. “단체가 5년쯤 되니 동력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있었죠. 비영리단체가 되면 후원금 모금이나 행사장소를 구하는 데도 이점이 있어요.”
현재 회원은 50여명이다. 첫 집회 때부터 함께 한 이들이 절반 정도란다. 지난 연말 총회엔 10여명이 참여해 단체 진로를 두고 3시간 넘게 열띤 토론을 벌였단다. “다들 미국 생활에 바쁘니 활동 범위를 어느 정도 넓혀야 하는지를 두고 토론했죠. 그렇다고 위안부나 남북평화 이슈에 견해차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살때 가족이민 캘리포니아 정착
2014년 4월16일 참사때 한국 체류
“9·11때 ‘필사적 구조’와 달라 충격”
‘세월호 잊지않는 사람들 모임’ 꾸려
2년 뒤 관심 분야 넓혀 ‘공감’으로
올해 비영리단체 등록해 본격 활동
공감은 올해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한 여러 행사를 치러냈다. 지난 9월 팔로 알토 미첼 공원에 세월호 벤치를 설치했고 세월호 합창단 초청 공연과 북 콘서트도 했다. 벤치 제작엔 2500달러가 들었는데 4·16재단 지원금에 후원금을 보탰단다. “미국인들은 평일에도 공원을 많이 찾아요. 공원에 벤치를 놓아 세월호를 알리고 싶었어요. 내년에는 더 많이 설치하려고요. 제 개인 생각으로는 위안부 피해자 벤치도 만들고 싶어요.”
2015년부터는 해마다 수백 그루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이는 새너제이 크리스마스 공원에 세월호 희생자와 위안부 피해자 추모 트리도 장식하고 있다. “올해 필리핀계 미국인 할머니가 우리가 놓은 트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에 가장 다가온다고요.”
샌프란시스코 공감 회원들이 이번 겨울 새너제이 크리스마스 공원에 설치한 세월호 희생자와 위안부 피해자 추모 트리. 왼쪽 세월호 트리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별모양 장식물이 빛나고 있다. 김낙경 대표 제공
올해 세월호 합창 공연 뒤 유가족들과 공감 회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김낙경 대표 제공
공감 회원들은 로 카나 미 하원의원이 지난 2월 발의한 ‘한국전쟁 공식 종전 결의안’ 의회 통과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지지 의원은 42명이다. “카나 의원 지역구가 제가 사는 곳입니다. 회원들이 거주하는 베이 지역 하원의원 10명 중 6명이 지지 의사를 밝혔어요. 이 중 2명은 우리 회원들 설득이 영향을 미쳤죠. 한 의원은 결의안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회원들 요청에 지지 결정을 했어요.”
남북평화 문제에 혹 다른 생각을 가진 회원들이 있냐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남북평화 문제를 정치적으로 보지 않아요. 세월호나 위안부를 기본적으로 인권 문제로 보는 것처럼 남북평화도 마찬가지죠. 세계에서 우리만 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졌어요. 더는 전쟁과 이산으로 인한 아픔이 있어선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 남북평화를 말하는 거죠. 제 할머니도 올해 94세인데 이산가족입니다. 북에 형제를 두고 월남하셨죠.”
5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얼마나 안전한 사회가 되었다고 보는지 궁금했다. “지난 강원도 산불 때 전남 소방대원들이 가는 것을 보고 나아졌다고 느낀 적도 있어요. 하지만 화물선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건 같은 재난들을 보며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해요. 사고 대처나 관리 감독에 지금도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세월호 유가족이 경찰에 고소한 이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에 임명된 것도 놀라워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미국의 재난 대응에서 배울 게 있다면 뭘까? “미국은 지역 소방당국이 재난의 콘트롤 타워이죠. 어떤 재난이든 거기서 다 해결해요. 지역을 가장 잘 아는 기관이니까요. 콘트롤 타워이니 책임감 있게 대처하죠. 고 김용균 노동자가 억울하게 죽은 데는 안전 교육이 소홀한 탓도 있잖아요. 미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월호로 삶이 바뀐 것 같다고 하자 “네”라고 한 뒤 말을 이었다. “세월호 전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어요. 개인적으로 분노했죠. 세월호 뒤에는 행동하는 삶으로 바뀌었죠.”
공감은 ‘생활 밀착형 시민단체’라는 소리를 듣는다. 김 대표는 지역 농장에서 농작물을 대량 구매해 싼 가격으로 회원에 공급하고 남는 수익금을 단체 활동에 써왔다. “기금 마련을 위해 회원들에게 매번 50달러나 100달러씩 내라고 하면 얼마 안 가 지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부하고 먹을 것을 가져가면 회원들이 좀더 쉽게 참여할 것 같아 공동구매를 시작했어요. 지금껏 고구마나 귤, 밤, 다시마, 미역, 멸치, 김치, 참기름 등을 함께 샀어요.”
계획을 묻자 그는 디아스포라(이산)와 교육을 이야기했다. “여기 한인은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할 수 있죠. 한국도 그렇고 미국에도 종속되지 않아요. 단점이면서 이점이기도 하죠. 한국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에도 다 좋은 게 뭔지 찾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육입니다. 한인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알리고 싶어요. 한국 역사도 가르치고요. 그들이 뿌리를 잊지 않도록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