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최홍식 회장
서울 지하철 7호선 학동역 근처에 자리한 제일이비인후과 최홍식(67) 원장은 ‘한국 후두음성언어의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후두나 성대 등 발성 기관의 문제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정상적인 목소리를 돌려주는 게 그의 일이다.
조용필과 윤형주 등 유명 가수들이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 성대 상태와 발성을 점검하고 있단다. 그는 김대중과 박근혜 두 대통령의 이비인후과 자문의를 지냈고 <교육방송> ‘명의’로도 두 차례나 뽑혔다. 지난해 연세대 의대에서 퇴임하고 지금은 대학 제자들과 함께 연 병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다.
2015년 7월부터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도 맡고 있는 그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글 연구와 보급에 헌신한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다. 외솔의 삼남인 그의 부친은 국내 1호 ‘정신병원’인 청량리뇌병원을 연 최신해(1919~91) 원장이다. 지난달 28일 병원 사무실에서 최 원장을 만났다.
“부친 영향으로 의대에 갔어요. 제 형님과 큰 조카도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비인후과는 제가 관심이 가서 전공했어죠. 이비인후과의 귀·코·목 중에서 하필 목을 선택해 후두음성언어의학을 한 데는 할아버지 영향이 큽니다. 이비인후과 전공의 때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조부가 쓴 <한글갈>(1940)을 보면서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음성언어의학이 연결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어금니소리글자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이며 입술소리글자 ‘ㅁ’은 입 모양을 본떴다고 나온다. 목소리 치료를 하려고 조음 과정까지 연구해야 하는 그의 일이 조부가 평생을 바친 한글 연구와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4년 전 <세종학연구 16집>에 발표한 논문 ‘음성학과 음성의학으로 풀어보는 훈민정음 제자해’에서 훈민정음 28자는 모두 “발성 때 옆에서 본 소릿길(성대 바로 위 인두강과 입안)의 모습”이라는 가설를 제시했다. 예컨대 해례본에서는 입 모양이라는 ‘ㅁ’은 “앞 막음은 입술의 막힘, 위 직선은 입천장, 아래 직선은 혀, 뒤 막음은 인두(혹은 후두)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해례본에 나오는 “정음 28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에서 ‘그 모양’은 바로 “조음 때 옆에서 본 성도(소릿길)의 모습”이라는 게 그의 추론이다. 그는 재작년에는 컴퓨터 단층 촬영(CT)으로, 제주어 방언에서 보이는 ‘아래 아’(ㆍ) 조음의 영상의학과 음향학적 특성을 살피는 논문도 발표했다.
이 가설에 대한 한글학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한글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에만 머물러 있어요. 거기서 진전이 없어요. 음성공학이나 음성의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 모여 함께 연구해야죠. 융합연구가 필요해요.” 덧붙였다. “‘ㅁ’에서 앞 입술과 뒤 성대가 터져 ‘ㅍ’이 됩니다. 이런 설명을 해주면 사람들이 다 놀랍니다. 해례본에서는 치아 모습이라고 기술한 ㅅ도 혀가 앞니 아래쪽에 닫는 모습을 옆에서 본 거죠. 정음 28자는 발음할 때 소릿길의 변화를 보고 만들었어요. 그게 핵심이죠. 세종대왕이 다 머릿속에서 생각했어요. 아들인 문종과 딸 정의공주를 앞에 앉히고 발음시켜 보고 터득한 거죠.”
최현배 선생 손자로 외솔회 한글운동
“조부 영향으로 음성의학 연구”
CT 의료장비로 한글 창제원리 탐구
“정음 28자, 옆에서 본 입안 모습”
조부 뜻이어 5년째 세종사업회 이사장
“세종대왕기념관 용산 이전했으면” 김대중·박근혜 ‘대통령 자문의’ 지내 후속 연구 계획을 묻자 “시티보다 훨씬 잘 보이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으로 훈민정음 기본모음 외에 이중모음과 삼중모음의 음향 분석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저도 의사이지만 엠아르아이 장비를 개인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1994년에 외솔회 이사를 맡으며 조부의 뜻을 잇는 한글 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1970년 창립한 외솔회는 외솔 선생의 학술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학술 단체다. 그는 2008년부터 7년 동안 이사장으로 이 단체를 이끌었고 그 뒤로는 친동생인 은미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창립 이후 외솔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출판사(정음사)가 어려워지면서 10년 가까이 외솔회 활동이 침체됐어요. 그러던 차에 조부의 대학 제자 분께서 간곡히 부탁해 제가 이사를 맡았죠. 동생(최은미 이사장)은 조부의 뜻을 잇겠다는 생각으로 전공도 국문학을 선택해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나왔죠.” 그가 5년간 이끈 세종대왕기념사업회도 조부와 인연이 깊다. 사업회 설립 제안자인 외솔은 생의 마지막 2년(1968~70) 남짓 동안은 이 단체 회장도 맡았다. 사업회는 세종에 관한 문헌과 국학 자료를 우리말로 옮기는 편찬 사업에 힘을 쏟고 있으며 세종 글짓기 대회와 외국인 대상 글쓰기 대회 등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회장이 된 뒤에는 한글에 대한 젊은층 관심을 키우기 위해 ‘한글 사랑 손수제작동영상(UCC) 공모전’도 새로 만들었다. “올해 개관 47돌인 세종대왕기념관이 세종을 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낡았어요. 용산공원 부지에 새로 지어 옮기면 좋겠어요. 6년 전에 용산에 국립한국박물관도 들어섰으니 그 옆에 기념관이 있으면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멋진 여행 코스가 될 겁니다.” 사업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껏 사재 7억원을 내놓았다는 최 회장의 바람이다. 사업회를 이끌며 새삼 깨달은 세종의 위대함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정말 심각한 환자였어요. 32년 동안 즉위하면서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됐고 당뇨나, 관절이 굳는 특수한 질환으로 고통받았어요. 이런 상태에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몸 간수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세종은 백성을 천민(하늘이 허락한 백성)이라고 부르며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했죠. 농사가 잘돼야 백성이 잘 먹고 잘산다며 측우기를 만든 것도 세종의 백성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조부에 대한 기억도 물었다. “할아버지가 최고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적으로는 자기 주장이 셌지만 자식과 손자들에게는 굉장히 온화했어요. 손주들과 이야기하다 존댓말이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주셨죠. 1년에 4~5번 (서울 마포구) 대흥동 할아버지 집을 찾아 저녁을 먹었어요. 식사 뒤 할아버지 서재를 가서 뭐 하시나 보면 그날 온 신문을 보며 맞춤법이나 글이 틀린 것을 표시하고 계셨어요. 그렇게 고친 뒤에는 신문사에 우편으로 보내셨죠. 할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난 화분을 보내시기도 했어요. 카드도 함께 보냈는데 거기에는 ‘꽃이 예쁘게 피려면 물도 주고 정성껏 가꿔야 한다. 우리 말과 글을 가다듬는데도 정성이 필요하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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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선생의 손자인 최홍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세종대왕기념관 용산 이전했으면” 김대중·박근혜 ‘대통령 자문의’ 지내 후속 연구 계획을 묻자 “시티보다 훨씬 잘 보이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으로 훈민정음 기본모음 외에 이중모음과 삼중모음의 음향 분석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저도 의사이지만 엠아르아이 장비를 개인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1994년에 외솔회 이사를 맡으며 조부의 뜻을 잇는 한글 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1970년 창립한 외솔회는 외솔 선생의 학술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학술 단체다. 그는 2008년부터 7년 동안 이사장으로 이 단체를 이끌었고 그 뒤로는 친동생인 은미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창립 이후 외솔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출판사(정음사)가 어려워지면서 10년 가까이 외솔회 활동이 침체됐어요. 그러던 차에 조부의 대학 제자 분께서 간곡히 부탁해 제가 이사를 맡았죠. 동생(최은미 이사장)은 조부의 뜻을 잇겠다는 생각으로 전공도 국문학을 선택해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나왔죠.” 그가 5년간 이끈 세종대왕기념사업회도 조부와 인연이 깊다. 사업회 설립 제안자인 외솔은 생의 마지막 2년(1968~70) 남짓 동안은 이 단체 회장도 맡았다. 사업회는 세종에 관한 문헌과 국학 자료를 우리말로 옮기는 편찬 사업에 힘을 쏟고 있으며 세종 글짓기 대회와 외국인 대상 글쓰기 대회 등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회장이 된 뒤에는 한글에 대한 젊은층 관심을 키우기 위해 ‘한글 사랑 손수제작동영상(UCC) 공모전’도 새로 만들었다. “올해 개관 47돌인 세종대왕기념관이 세종을 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낡았어요. 용산공원 부지에 새로 지어 옮기면 좋겠어요. 6년 전에 용산에 국립한국박물관도 들어섰으니 그 옆에 기념관이 있으면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멋진 여행 코스가 될 겁니다.” 사업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껏 사재 7억원을 내놓았다는 최 회장의 바람이다. 사업회를 이끌며 새삼 깨달은 세종의 위대함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정말 심각한 환자였어요. 32년 동안 즉위하면서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됐고 당뇨나, 관절이 굳는 특수한 질환으로 고통받았어요. 이런 상태에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몸 간수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세종은 백성을 천민(하늘이 허락한 백성)이라고 부르며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했죠. 농사가 잘돼야 백성이 잘 먹고 잘산다며 측우기를 만든 것도 세종의 백성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조부에 대한 기억도 물었다. “할아버지가 최고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적으로는 자기 주장이 셌지만 자식과 손자들에게는 굉장히 온화했어요. 손주들과 이야기하다 존댓말이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주셨죠. 1년에 4~5번 (서울 마포구) 대흥동 할아버지 집을 찾아 저녁을 먹었어요. 식사 뒤 할아버지 서재를 가서 뭐 하시나 보면 그날 온 신문을 보며 맞춤법이나 글이 틀린 것을 표시하고 계셨어요. 그렇게 고친 뒤에는 신문사에 우편으로 보내셨죠. 할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난 화분을 보내시기도 했어요. 카드도 함께 보냈는데 거기에는 ‘꽃이 예쁘게 피려면 물도 주고 정성껏 가꿔야 한다. 우리 말과 글을 가다듬는데도 정성이 필요하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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