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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독재 맞선 ‘익명의 펜’으로 경계 넘나든 지성인의 표상이십니다”

등록 2022-01-04 20:56수정 2022-03-17 11:58

[가신이의 발자취] 고 지명관 선배 동지의 영전에
1975년 11월 도쿄에 모인 ‘기독자민주동지회’의 국내외 회원들. 왼쪽부터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 이상철 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 지명관 교수, 박상증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림순만 전 미국 윌리엄패터슨대 교수 등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제공
1975년 11월 도쿄에 모인 ‘기독자민주동지회’의 국내외 회원들. 왼쪽부터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 이상철 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 지명관 교수, 박상증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림순만 전 미국 윌리엄패터슨대 교수 등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제공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 동지 지명관 선생님! 지난해 8월 제가 보내드린 <해외에서 함께한 민주화운동>을 다 읽어보았다고 하시며 역사적 작업을 했다고 전화로 칭찬해 주신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 됐습니다. 그때 더위 물러가면 춘천에 모시고 가서 막국수 대접해 드리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9월8일 남양주의 요양원으로 갔을 때 선생님은 며칠 전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상태였습니다. 어렵사리 면회를 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말씀을 못하셨지요. 그런데 지난 연말 가족 일정으로 건너온 미국에서 선생님의 비보를 받는 바람에, 마지막 영전 참배도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 명복을 빌게 되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암운이 짙어가던 1970년대 초반부터 선생님은 도쿄에서 오재식 형과 함께 망명을 결심하시고 나라 안팎의 민주화운동을 연결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활동에 혼신의 힘과 정성을 다 바치셨습니다. <세카이> 잡지에 실은 ‘티케이(TK)생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15년간 유신과 5공 독재가 붕괴될 때까지 한국어·영어·독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여론을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지지’로 이끄는 필독서였습니다. 국내의 탄압·고문·살상 상황을 낱낱이 기록해 폭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티케이생을 찾아내려고 온갖 공작과 조사를 했지요. 하지만 끝까지 숨길 수 있었던 것은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 선생님의 ‘007 작전’같은 지혜의 성과였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수십 또는 수백장의 원고를 야스에 부인이나 비서가 옮겨 적어 인쇄소로 보내고, 원본은 바로 태워버려 필체 추적을 막았던 것입니다.

구속자 가족을 돕고, 동아·조선의 해직 언론인과 해직 교수들을 돕기 위해, 김지하·김대중의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국외 여론 조성과 미국·일본·독일 정부에 대한 로비 활동이 필요했습니다. 1975년 11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 기독교 기관들의 지원을 받으며 국내외 운동의 연대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기독자민주동지회’를 조직했습니다. 미주의 김재준·이승만·이상철·림순만, 일본의 지명관·오재식·이인하, 유럽의 박상증·장성환·신필균·이삼열 등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비밀리에 모였고, 선생님이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으셨지요.

도쿄 시절 선생님은 교회 쪽에서 지원해주는 적은 비용으로 활동과 가족을 부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미주와 일본에 한민통, 독일에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등 여러 동포들의 운동조직이 있었지만 국제적 연대와 국내와의 전략 협력을 위해 ‘민주동지회’의 비밀 활동이 긴요했습니다. 한때 민주동지회에서는 국내 민주세력이 말살되고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처럼 유신정권이 지속된다면 일제강점기 상하이 임시정부처럼 캐나다에 임시망명정부를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논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정권은 암살로 붕괴됐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5공 독재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들어 저를 포함해 국외 동지들 일부는 귀국해 적응하며 활동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티케이생 임무가 막중해 도쿄의 거점을 지키시며 5공이 무너질 때까지 펜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돌이켜보니, 선생님과 60년 인연이었습니다. 1962년 5윌 제가 서울 문리대 학생으로 ‘학림제’를 주관했을 때 덕성여대 교수인 선생님께서 ‘종교와 사회참여’ 제목으로 초청강연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지성인의 사회참여는 앙가쥬망(참여)과 데가주망(이탈)의 변증법적 결합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구절이 제 가슴을 깊이 울렸고 일생동안 큰교훈이 되었습니다. 종교인, 학자, 지성인들은 역사가 부를 때 현실정치에 비판자, 조언자로 참여해야 하지만 정치권력의 현장에서는 물러설 줄 아는 데가주망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일생, 종교철학 연구·<사상계> 편집·대학 교수·국외 민주화운동·티케이생 통신·한국방송(KBS) 이사장·한림대 일본연구소장으로 이어진 선생님의 삶 자체가 회고록 <경계를 넘나든 여행자>(2004) 제목 그대로 ‘앙가주망과 데가주망의 조화로운 결합과 실천’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선생님의 명복과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면서 멀리 뉴욕에서 두 손 모아 절을 올립니다.

이삼열/숭실대 명예교수·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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