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궂긴소식

“세기와 동·서양 관통한 ‘현대미술사의 현장’ 그 자체였지요”

등록 2022-03-03 20:37수정 2022-03-17 11:57

[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병기 화백 영전에 올리는 윤범모 관장의 글
지난해 9월 경기도 장흥 자택에서 김병기(왼쪽) 화백과 윤범모(오른쪽) 국립현매미술관장이 함께했다. 김 화백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됐다. 김경애 기자
지난해 9월 경기도 장흥 자택에서 김병기(왼쪽) 화백과 윤범모(오른쪽) 국립현매미술관장이 함께했다. 김 화백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됐다. 김경애 기자

‘살아 있는 한국 현대미술사’. 맞는 말이다. 20세기를 이리저리 관통하면서, 다채롭게 이어진 그의 삶은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역사에 화려하게 남아 있는 이름들. 예컨대 이런 이름들은 어떤가. 시인 이상·백석·윤동주, 소설가 김동인·이효석, 화가 김관호·길진섭·이중섭·문학수·이쾌대·김환기·유영국·장욱진·김창열, 정치계의 김일성·이승만 등등. 이런 인물들과 만나 각별한 추억을 남겼다면? 그것도 단 한 사람이! 그렇다. 단 한 사람이 숱한 명가들을 만나 고비고비 역사를 추스르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했다.

김병기, 1916년생이니 만 106살의 현역화가였다. 100살 기념 신작 개인전을 개최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화가. 정말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희귀한 사례였다. 그런 그가 103돌 3·1절날 갑작스럽게 이승을 떠났다. 별다른 고통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고 김병기 화백이 1954년 ‘성미술전람회’ 출품작이자 현존하는 가장 초기작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맨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이다. 고 임응식 사진가가 찍어 소장해온 사진으로 손자 임상철씨가 ‘한겨레’에 처음 제공했다.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임응식사진아카이브
고 김병기 화백이 1954년 ‘성미술전람회’ 출품작이자 현존하는 가장 초기작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맨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이다. 고 임응식 사진가가 찍어 소장해온 사진으로 손자 임상철씨가 ‘한겨레’에 처음 제공했다.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임응식사진아카이브

김병기. 그는 유화 수용의 선구자였던 화가 김찬영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년간을 이중섭과 같은 반에서 함께 다녔다. 이중섭의 생애는 40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단짝은 한 세기를 넘는 기록을 세워 대조적이다. 1930년대 일본 도쿄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연구한 김병기, 그는 귀국 뒤 이미 평양 미술계의 중심에서 존재감을 세우기 시작했다. 광복 직후 평양의 예술가를 대표하여 김일성과 대좌했고, 월남 이후 종군화가, 서울대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1966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심사위원을 지내고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49살 때 건너가 49년 만인 2014년 귀국했다. 그는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를 비롯해 구상과 추상, 창작과 비평, 전통과 전위 등을 넘나들며 폭넓은 활동 영역을 보였다.

1985년 나는 미국 뉴욕주 사라토가에서 칩거하던 그와 처음 만났다. 도미 이후 20년간의 은둔생활로 김병기는 한국 미술계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다. 나의 주선으로 김 화백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그 여세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발견한 범모씨’ 혹은 ‘은인’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 황송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의 발견’이 분명 화백의 일생에 커다란 변화를 준 것은 사실이었다.

김 화백은 ‘현대미술 운동가’라는 표현에 걸맞는 족적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이래 만연한 아카데미즘의 폐해를 질타하면서 새로운 미술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의 바탕에는 지성인 화가의 면모가 어려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이기 때문인지, 반전(反戰)주의자로서 휴머니즘의 옹호자였다. 분단은 그의 고향을 찾지 못하게 해 한으로 남았다.

지난 3월1일 별세한 ‘106살 최고령 현역’ 고 김병기 화백의 현대아산병원 빈소에 2일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김경애 기자
지난 3월1일 별세한 ‘106살 최고령 현역’ 고 김병기 화백의 현대아산병원 빈소에 2일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김경애 기자

나는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고, 그 내용을 <한겨레>에 연재했다. 지난 2017년 1년간 매주 일요일 밤이면 화백과 대좌했다. 그는 대여섯 시간은 기본일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과 열변으로 증언을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이듬해 <백년을 그리다―102살 현역화가 김병기의 문화예술 비사>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한 인물의 생애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고 비중 있는 일화가 가득했다. 정말 한세기의 문화사였다.

그 책에서 화백은 이런 말을 남겼다. “20세기는 양식을 만든 시대였고, 21세기는 그 양식을 부수기도 한다.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가지고 포스트모던하려고 한다. 동양성을 가지고 기왕에 만들어진 것을 부수려고 한다. 서양에서 내려오는 것과 동양에서 내려오는 게 서로 마주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의 무위라는 개념은 흥미롭다. 하지 않는 게 하는 것.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것. 길이 길일 때 이미 길이 아니라는 노자 철학이 마음에 와 닿는다. 길이라는 하나의 ‘양식’이 됐을 때 벌써 그것은 양식이 아니다. 길이 아니다. 노자는 이 굉장한 이야기를 2천년도 전에 했다. 20세기에 길이라고 했던 것이 21세기에도 그대로 길인가.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천재적인 작업을 하고 일찍 요절한 예술가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오랜 기간 숙성해서 나온 예술을 좋아한다. 숙성된 예술, 오늘의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개념이다.”

김 화백의 육성. 정말 그립다. 이제 한 시대가 꺾어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숙대 ‘김건희 석사 논문’ 연구윤리위원 교체…표절 의혹 조사 급물살 1.

숙대 ‘김건희 석사 논문’ 연구윤리위원 교체…표절 의혹 조사 급물살

“어르신, 7시간 이상 휠체어에 묶여...일종의 체포·감금죄” 2.

“어르신, 7시간 이상 휠체어에 묶여...일종의 체포·감금죄”

서울교육감 후보 넷인데…‘보수 조전혁’만 초청한 KBS 대담 3.

서울교육감 후보 넷인데…‘보수 조전혁’만 초청한 KBS 대담

정부 “전제조건 없이 만나자”…의료계 “내년 의대정원 입장 분명히 해야” 4.

정부 “전제조건 없이 만나자”…의료계 “내년 의대정원 입장 분명히 해야”

길가서 배곯은 40일 된 아기…경찰, 새벽에 조리원 찾아 분유 구해 5.

길가서 배곯은 40일 된 아기…경찰, 새벽에 조리원 찾아 분유 구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