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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사형 선고에도 노래하던 ‘광주내란 수괴’ 그 웃음 영원하소서”

등록 2022-06-05 19:31수정 2022-06-06 02:34

[가신이의 발자취]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보내며
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전남대 복적생 김상윤(왼쪽부터), 조선대 복적생 김운기, 전남대 복적생 대표 정동년. 1990년대 초 전남 완도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김상윤 고문 제공
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전남대 복적생 김상윤(왼쪽부터), 조선대 복적생 김운기, 전남대 복적생 대표 정동년. 1990년대 초 전남 완도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김상윤 고문 제공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이끈 동년형
1980년 봄 전남대 복적생으로 ‘인연’
동교동 방명록이 ‘내란 조작’ 불씨로
“모진 고문 ‘김대중 자금 수령’ 진술”
상무대 영창에서 자살 시도하기도

“어이, 상윤이. 이번에 정동년도 같이 복학시키소.” “정동년이 누군데요?” “하기사, 자네들이 정동년을 알 턱이 없지.”

1980년 3월이었습니다. 박석무 선배가 나를 불러 1965년 전남대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 제적당한 정동년 선배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앞서 1964년 ‘6·3 시위’를 함께 주도한 정동년은 이듬해에 총학생회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기인 이홍길, 박석무 등이 적극 지원한 성과였습니다. 1965년 3월31일, 전남대에서 전국 최초로 시위가 다시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학생회장 정동년은 구속되었다가 2개월 뒤 석방되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또 시위를 주도해 결국 제적당했던 것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된 뒤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나는 1980년 봄 복적생, 정동년은 복적생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5년 세월의 간극은 컸습니다. 이 고집불통의 선배는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동지들인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교감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윤한봉 선배와 나는 학생운동이 정치권과 단호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둘과 박관현 학생회장을 정읍에서 열리는 동학기념식에 데려가려 했지만 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을 직접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정동년 선배는 동교동을 방문했으나 직접 김대중을 만나지는 못하고 방명록에 이름만 적어놓고 돌아온 모양입니다. 이것이 결국 큰 사달을 만들었습니다.

‘80년 5월’ 수감자들로 넘쳐났던 광주 상무대 영창의 같은 방에 있던 한 병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놀라서 화장실로 뛰어가니 동년 형이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교동 방명록에서 ‘정동년’ 이름을 발견한 합수단은 혹독한 고문을 가해, 그가 김대중에게 시위 자금으로 500만원을 수령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모양입니다. 동년 형과 나는 앞서 5월 17일 자정 무렵 신군부의 계엄령으로 예비검속되었기 때문에, 기껏해야 포고령 위반으로 3년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해질 것을 감지했는지 동년 형은 갈라진 스푼으로 이마와 배를 갈라 자살을 시도했고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그런데 6월 말께 전남대 학생회 간부 몇 명이 자수해 영창으로 들어왔습니다. 총무부장 양강섭이 ‘학생회장 선거 때 김상윤 선배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내란 수괴’를 누구로 정할지 고민하던 합수단은 나를 혹독하게 고문했고, 끝내 내가 박관현에게 준 선거자금을 김대중에게 받은 것으로 둔갑시켰습니다.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준 내란 자금 500만원은 윤한봉을 통해 조선대 김운기에게 일부 전달되고, 김상윤을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로 전달되었다’는 각본이 그렇게 짜였죠.

정동년은 재소환되었고, 합수단은 자신들이 만든 각본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미 김상윤·김운기를 통해 각본을 완성해 놓은 다음이었습니다. 동년 형은 여러 번 까무러칠 정도로 린치를 당한 끝에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김운기는 ‘왜 내가 전남대 윤한봉에게 돈을 받았다고 하느냐, 내가 직접 김대중에게 돈을 받아왔다고 해달라’고 했으나, ‘그건 각본에 없어, 이 자식아’ 그러면서 온몸이 까맣게 되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

“정동년 사형! 김상윤 20년!” 당연히 사형당하리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개죽음당한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했지만,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상윤 20년’이라는 선고를 받자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온몸에 환희가 차오르는 듯했습니다. ‘정동년 사형!’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아예 없었습니다.

고 정동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 상임위원장이 지난 5월17일 ‘5·18’ 42돌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그는 12일 뒤 별세해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혔다. 연합뉴스
고 정동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 상임위원장이 지난 5월17일 ‘5·18’ 42돌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그는 12일 뒤 별세해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혔다. 연합뉴스

재판을 마치고 우리 일행이 트럭을 타고 교도소로 돌아가는데, 동년 형의 형수가 먼발치에서 혼자 망연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형수, 우리 죽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교도소에 도착해서도, 동년 형은 마냥 콧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넋이 나간 사람 같았으나 겉모습은 참으로 태연했습니다. 나는 형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독방으로 돌아와 한없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동년이 형,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우리는 항소이유서를 아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따위를 써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상윤이, 그래도 역사적 기록은 남겨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제대로 된 항소이유서를 써서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세.” 동년 형의 권유에 못 이겨 나는 무려 13장이나 되는 항소이유서를 썼고, 그것을 밖으로 빼내 아내에게 전달했습니다. 아내는 정형달 신부와 상의했고, 황석영 형을 통해 일본으로 몰래 빼돌리자고 의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쓴 항소이유서가 외신을 통해 알려지면 ‘광주사태’의 진실이 세계만방에 알려지리라는 것이었지요.

순간적인 판단으로 나는 반대했습니다. 또다시 저들의 혹독한 고문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보다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쓴 옥중수기 ‘고행 1974년’으로 인혁당 사건 조작 사실이 폭로되자 박정희 정권은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8명에 대한 형을 집행해버렸으니까요. ‘나 때문에 사형 언도를 받은 정동년이. 또다시 내 항소이유서 때문에 사형이 집행된다면, 나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습니다.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석영이 형 보고 일본에 선물 보내지 말라고 하세요.”

대법에서 형이 확정된 뒤 같은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가는 동안 동년 형의 큰 웃음이 너무 밝고 환해 보여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느 해 경상도 어느 교도소에서 석방되는 형님을 모시러 갔을 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큰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셨지요. 이제 형님의 그 큰 웃음은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정동년의 부활, 오월 광주의 부활’을 끊임없이 노래하리라 믿습니다.

“정동년, 나의 영원한 형님! 이제 모든 시름 뒤로 하시고 마음 편히 쉬십시오.”

김상윤/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전 녹두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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