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고 안성주 전 고대 민주동우회장을 보내며

고 안성주씨가 고려대 3학년 때인 1983년 11월 안암 교정 홍보관에서 ‘학원민주화투쟁 선언문’을 뿌리며 시위를 하고 있다. 고대민주동우회 제공
동기 중 가장 먼저 옥살이 고초
남편 옥바라지에 방송작가 ‘알바’ 아무리 ‘죽음이란 그저 자연으로 흩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니 애달파 마라’ 고 수천 년 전부터 현자들이 말을 하고 있지만, 지난달 26일 환갑을 겨우 넘어 떠난 나의 오랜 친구 안성주의 한여름 죽음은 애달프다. 100살을 앞둔 스코트 니어링이 하루 여섯 짐의 땔감을 해낼 수 없자 아내의 도움으로 곡기를 끊고 정돈된 죽음을 맞이했듯이 몇 가지 자잘한 걱정은 했지만 가족의 손을 잡고 평안히 눈을 감았다 하니 더 애달프다.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경상도 촌놈이고 안성주는 경기도 이천의 주유소 집 딸이었다. 1981년 고려대에 입학해 보니, 학교가 아니라 감옥보다 못한 곳이었다. 운동장에는 족히 오백 명이 넘는 전투경찰이 완전무장을 한 채 줄지어 앉아 있고 잔디밭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새까만 얼굴의 정체 모를 사람들이 무더기로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짭새’라 불린 이들이 강의실에서까지 드문드문 앉아 있으니 교수나 학생이나 말도 쉽게 하지 못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2년쯤 계속되었다. 1960년대 초반 태어나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자란 까닭에,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게 컸던 우리 세대에게조차 이 현실은 충격과 분노였다. 인간에게 제기된 문제는 인간이 반드시 해결했듯이 우리는 깨치고 나아갔다.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사흘 밤낮을 죽도록 얻어맞고, 어느 날 밤 느닷없이 끌려가 다음날 군대 연병장에서 흙범벅이 되어도 굴하지 않았다. 경찰이 오백 명, 학생은 백 명이었으니 교내 시위조차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주동자는 징역 3 년이 공식 형량인 시절이었다. 안성주는 1983년 11월 레이건 미 대통령 방한 전 날, ‘학원민주화투쟁 선언문’을 뿌리며, 81학번 중 가장 먼저 시위 주동을 했고 감옥에 갔다. 각 대학마다 경찰 오백 명으로 시위대 천 명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학원 자율화’라는 미명의 유화책을 내밀었고 성주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안성주는 1986년초 대학 서클 청년문제연구회의 선배(홍순우)와 결혼했는데, 민주화운동하는 사람이라고 집안에서는 지원을 끊었다. 하지만 방송작가 일을 하며 인천 공단지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씩씩하게 남매를 키웠다. 그는 언젠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이렇게 써놓았다. “전두환 시절에 나는 감옥에 들어갔고 고문을 받았던 트라우마가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내게 잠재돼 있다. (…) 전두환 시절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번엔 남편이 감옥에 갔다. 혼인신고도 못한 상황에서 결혼 사진을 들고가 사실혼임을 증명하고 간신히 솜누비옷과 털양말을 넣어주었다. (…) 아기를 가졌는데 사과 하나 사먹을 단돈 천원이 없었다. 그래서 방송사 선배들을 찾아가 ‘알바’ 자리를 부탁했다. 그러다 시작한 프리랜서 방송작가. 전두환 시절에 프로그램 말미에 책 소개를 하다가 ‘민중'이란 단어를 썼다고 녹화가 중단되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바로 그 프로그램 제작에서 짤렸다. 임신한 몸으로 광화문 거리에 엎드려 눈물, 콧물 흘리며 구토를 해댔다.” 2002년 외주제작사 푸르메 차려
2014년 독립제작사협회 회장 뽑혀
딸 홍지민 덴마크 왕립발레단원

2016년 덴마크 왕립발레단의 유일한 아시아인 발레리나가 된 딸 홍지민의 귀국 공연 때 남편 홍순우(전 경남지사 특별보좌관)씨와 함께한 고 안성주씨. 고대민주동우회 제공

고 안성주씨의 큰딸 발레리나 홍지민(왼쪽)씨와 사위 니콜라스 웨스터 비(오른쪽) 부부. 201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예비후보로 나선 부친 홍순우씨를 지지하는 영상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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