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29일 오후 조문객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새달 1일 오전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본사에서 노제가 열린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두식 전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해직
창간 첫 사회부장 ‘소신’ 펼쳐
탄압 맞서 독립경영 토대 마련 “나를 ‘보수·반동’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기사를 써와라!” 1988년 5월15일부터 서울 양평동 공장지대 한가운데 자리잡은 ‘새신문’ <한겨레신문> 편집국에는 늘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초대 사회교육부 편집위원으로서 그는 “신문의 생명은 신뢰다. 감정과 이념에 앞서 ‘팩트’(사실)부터 확인하라”는 원칙과 소신을 고수했다. 일찍이 그와 함께 언론자유 투쟁을 했던 동지들은 ‘발로 뛰는 사건기자’였던 그이기에 당연하게 여겼지만, 혈기와 의욕이 앞서던 젊은 기자들에게는 ‘고집 센 옛날 기자’로 비쳐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와 함께 날밤을 새우며 논쟁했던 후배 기자들은 그런 그의 ‘원칙’이 오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봇물처럼 분출하던 언론 자유 열기 속에서 <한겨레신문>이 단순한 ‘특종’을 넘어 합리적이고 냉정한 사회여론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기억한다. 또 이후 20여년 동안 ‘신뢰도 1위 신문, 한겨레’의 전통을 세운 주춧돌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43년 충남 연기에서 실향민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68년 <동아일보> 입사 때까지 흔히 말하는 ‘수재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74년 3월 유신독재에 맞서 국내 첫 ‘언론노조’를 결성하고, ‘자유언론 실천’을 주창하다 이듬해 해직되면서 그는 ‘동아투위의 투사’로서 파란과 인고의 길을 감내해야 했다. 28일 오후 그의 ‘심장마비 돌연사’ 소식을 받아들고 황망할 수밖에 없었던 후배들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애정을 감추지 못했던’ 따뜻한 선배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 ‘굴러다니는 술병’이라 부르며 누구하고나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며 논쟁을 즐기던 뜨거운 선배였다. 그런 소탈함은 해직 이후 유신정권에 의해 취업길이 막히자, 이른바 ‘먹물 간판’을 훌훌 벗어던지고 남대문시장에서 남성복 장사를 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대전에서 석달 남짓 노숙생활까지 했던 삶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91년 공안정권의 노골적인 광고 탄압에 맞서며 위기에 처한 신문사의 안정을 위해 기꺼이 광고국장을 맡은 그는 상무이사를 거쳐 94~95년 제6대 대표이사로서 한겨레가 ‘독립 언론 경영’의 토대를 닦는 데 기여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사만의 독특한 경영 원칙을 세우고자 정관과 제도를 정비했고,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의 창간·기획, 사옥 증축, 고성능 윤전기 도입, 한겨레문화센터 설립, 출판사업·뉴디미어 진출 등을 주도했다. 한겨레가 창간 이후 첫 흑자를 기록한 것도 그의 사장 재임 때였다. <동아일보> 입사 동기이자 동아투위 동지인 성유보 초대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은 “74년 5~8년차 경력기자 33명이 처음으로 뭉쳐 ‘노조 결성’을 결의한 곳이 바로 약수동 그의 신혼집이었다”며 “열정을 다해 취재해 온 기사가 검열에 막혀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때마다 의분에 떨며 거침없이 항의하던 ‘열혈 청년 기자 김두식’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창간 첫 사회부장 ‘소신’ 펼쳐
탄압 맞서 독립경영 토대 마련 “나를 ‘보수·반동’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기사를 써와라!” 1988년 5월15일부터 서울 양평동 공장지대 한가운데 자리잡은 ‘새신문’ <한겨레신문> 편집국에는 늘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초대 사회교육부 편집위원으로서 그는 “신문의 생명은 신뢰다. 감정과 이념에 앞서 ‘팩트’(사실)부터 확인하라”는 원칙과 소신을 고수했다. 일찍이 그와 함께 언론자유 투쟁을 했던 동지들은 ‘발로 뛰는 사건기자’였던 그이기에 당연하게 여겼지만, 혈기와 의욕이 앞서던 젊은 기자들에게는 ‘고집 센 옛날 기자’로 비쳐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와 함께 날밤을 새우며 논쟁했던 후배 기자들은 그런 그의 ‘원칙’이 오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봇물처럼 분출하던 언론 자유 열기 속에서 <한겨레신문>이 단순한 ‘특종’을 넘어 합리적이고 냉정한 사회여론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기억한다. 또 이후 20여년 동안 ‘신뢰도 1위 신문, 한겨레’의 전통을 세운 주춧돌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43년 충남 연기에서 실향민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68년 <동아일보> 입사 때까지 흔히 말하는 ‘수재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74년 3월 유신독재에 맞서 국내 첫 ‘언론노조’를 결성하고, ‘자유언론 실천’을 주창하다 이듬해 해직되면서 그는 ‘동아투위의 투사’로서 파란과 인고의 길을 감내해야 했다. 28일 오후 그의 ‘심장마비 돌연사’ 소식을 받아들고 황망할 수밖에 없었던 후배들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애정을 감추지 못했던’ 따뜻한 선배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 ‘굴러다니는 술병’이라 부르며 누구하고나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며 논쟁을 즐기던 뜨거운 선배였다. 그런 소탈함은 해직 이후 유신정권에 의해 취업길이 막히자, 이른바 ‘먹물 간판’을 훌훌 벗어던지고 남대문시장에서 남성복 장사를 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대전에서 석달 남짓 노숙생활까지 했던 삶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91년 공안정권의 노골적인 광고 탄압에 맞서며 위기에 처한 신문사의 안정을 위해 기꺼이 광고국장을 맡은 그는 상무이사를 거쳐 94~95년 제6대 대표이사로서 한겨레가 ‘독립 언론 경영’의 토대를 닦는 데 기여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사만의 독특한 경영 원칙을 세우고자 정관과 제도를 정비했고,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의 창간·기획, 사옥 증축, 고성능 윤전기 도입, 한겨레문화센터 설립, 출판사업·뉴디미어 진출 등을 주도했다. 한겨레가 창간 이후 첫 흑자를 기록한 것도 그의 사장 재임 때였다. <동아일보> 입사 동기이자 동아투위 동지인 성유보 초대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은 “74년 5~8년차 경력기자 33명이 처음으로 뭉쳐 ‘노조 결성’을 결의한 곳이 바로 약수동 그의 신혼집이었다”며 “열정을 다해 취재해 온 기사가 검열에 막혀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때마다 의분에 떨며 거침없이 항의하던 ‘열혈 청년 기자 김두식’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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