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명 변호사(가운데)가 1988년 5월14일 송건호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오른쪽), 임재경 부사장(왼쪽)과 함께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들고 감격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돈명 인권변호사 별세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추앙받아온 ‘범하’ 이돈명 선생의 별칭이자 애칭은 뜻밖에도 ‘촌놈’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무지렁이 농군’으로 살아갈 뻔했던 그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독재와 억압의 시대에 칼날 위를 걸어야 했던 모든 양심수들에게 온몸으로 방패가 되어 준 그 우직한 품성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다.
초등학교만 나와 오로지 독학으로 서른이 넘어 고시에 합격한 그는 탄탄한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1970년대 스스로 반유신의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됐다고 판단한 그는 이름만 알 뿐 친분은 없었던 후배 황인철·홍성우 변호사를 찾아가 구속자 변론 활동에 합류했다. 이후 20여년의 민주화 투쟁의 길에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맨 앞에 서 있었다.
환갑이 훨씬 넘은 86년 10월 그 자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8개월이나 수감됐던 사건은 그의 우직함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일화다. 당시 수배중이던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씨를 숨겨주고 도피자금을 줬다는 그의 혐의는 사실이 전혀 아니었으나, 실제로 이씨를 도와준 후배 고영구 변호사를 보호하고자 기꺼이 옥고를 치른 것이었다. “나는 불의에 쫓기는 한 마리 양을 보호했을 뿐, 결코 범인을 은닉했다는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최후진술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일종의 격언이 되기도 했다.
그때 투옥으로 얻은 심장병을 비롯해 암 투병과 다리 수술 등으로 내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구십 평생 ‘인권과 민주의 현장’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지켰다. 마지막 사회 활동이 된 지난해 8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재개관 기념예술제에서도 그는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특유의 순박한 말투와 표정으로 축사를 해냈다.
두해 전 겨울, 동갑이자 평생의 지기였던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 때 인터뷰에서 했던 그의 애도의 말이 마치 유언처럼 남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 것이니 피할 도리가 없지만… 세상이 좋은 분을 또 잃었어. 남은 사람들이 잘해야제.”
유족으로는 아들 이영일(전 한국은행국장·전 한국주택저당채권유동화 사장)·동헌(위아래구조기술사 사무소장)·사헌(미국 거주)씨와 사위 양원영(전 휘문고 교장)·서해준(전 다우케미칼 상무)씨 등이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