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사진) 전 국방부 장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
내란음모로 처벌 뒤 미국 건너가
회고록서 “쿠데타, 사전에 몰랐다”
내란음모로 처벌 뒤 미국 건너가
회고록서 “쿠데타, 사전에 몰랐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 4일 오전 9시15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별세했다. 향년 89.
장 전 장관은 5·16 당시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도 이를 방조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쿠데타 나흘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이후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국방부 장관으로 잇따라 추대됐다. 그러나 한 달이 안 된 6월6일 해임됐고, 이후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돼 196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장 전 장관은 1948년 여수순천 군인반란 사건에 연루돼 중형을 선고받게 된 박정희 당시 소령의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이 일로 예편했던 박정희가 6·25 때 육군 소령으로 복직할 당시 힘을 써줬고,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문제될 때마다 그를 감싸줬다. 육군참모총장 시절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가 보고될 때마다 당시 장면 총리에게 “제가 총장 자리에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장 전 장관은 2001년 펴낸 회고록 <망향>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을 조사했으나, 방첩부대장의 허위 보고로 진상 파악에 실패했다”며 “쿠데타를 사전에 알고 지원 혹은 방조했다고 보는 것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날조된 역사”라고 반박했다. 5·16에 대해서도 “소위 5·16정변 주체라는 사람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 발전 과정에 중대한 장애가 됐고, 우리 민주 정체에 암적 요소를 이식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책에서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자로서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이유가 어찌 됐건 진압하지 않았다. 그뿐이랴. 사태를 수습해 조속히 원상으로 복귀시키려 했던 일마저 실패했다. 즉 나는 참모총장으로서 연달아 세번이나 실패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일본 강점기 때 일본 도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 6·25 때 사단장을 맡아 전투에 참가했으며, 1956년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1961년 장면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1969년부터 미국 웨스턴미시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 뒤엔 플로리다에 거주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형숙씨와 아들 효수(재미 개인사업)·경수(의사)·진수(개인사업)·완수(의사)씨, 딸 윤화(아이오와대 의대 교수)씨 등 4남1녀가 있다. 장례식은 오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다. (02)798-3155.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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