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가신이의 발자취] 이수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뚝심의 농민투쟁 선봉장
참두릅 수확 자랑땐 천진
농업 말살 없는 곳서 편히
뚝심의 농민투쟁 선봉장
참두릅 수확 자랑땐 천진
농업 말살 없는 곳서 편히
동학농민혁명 두갑 주기인 2014년 7월23일, 전봉준 장군의 후예이자 적자임을 자타가 공인해왔던 이수금(사진)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님이 소천하셨습니다. 향년 73.
고향인 정읍뿐만 아니라 전라북도를 넘어 남녘 땅 곳곳에 농민운동의 씨를 뿌리고 강성하게 자라게 했던 분이었기에 의장님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경건합니다. 특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 쌀 관세화 등 우리 농업을 뿌리채 말살시키고 있는 엄중한 현실이기에 의장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이수금 의장님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던 선친의 영향과 문정현 신부 등 전북지역 진보성향 사제들의 인도에 따라, 1976년 20대 후반 가톨릭농민회에 입문한 이후 돌아가시는 날까지 언제나 이 땅의 농민과 민중과 함께 해왔습니다.
‘79년 노풍벼 투병’(정부 보급종 노풍벼의 수확량 격감 피해 보상 요구)에서 ‘85년 소몰이 투쟁’(전두환 동생 전경환의 수입소 도입에 의한 한우값 폭락 사태), ‘87년 수세폐지 투쟁’(조병갑 이래 일제가 법제화한 농민수탈 악법-논 물세 문제), ‘88년 고추값 폭락 항의’ 등등 억압된 민초들의 폭발적인 투쟁현장에서 항상 선두에 섰습니다. 또한 93년의 쌀수입 저지 투쟁과 이후 의료보험통합 요구 투쟁 때에도 전국의 농민대표 자리를 사양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 2년에 걸친 수배생활과 3차례의 옥고를 감내하셔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늘 뚝심있는 선봉장으로, 전국의 농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켜야 할 자리라면 어디든 달려가셨던 의장님! 전농 시절에도 날마다 이른 새벽 일복 차림으로 나서 논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농군이었지만, 어느새 투쟁의 앞자리에서 농민들과 울며 웃으며 함께 낮과 밤을 지새웠었습니다. 땀과 흙물로 얼룩진 얼굴로 저희들을 반겨주시던 의장님의 그 모습을 살아 남은 저희들이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의장님은 농민 권익보장을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생명과 자연을 아우르는 친환경농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백초 효소(백가지 산야초를 발효시킨 음료)와 유기농 매실액을 전국의 투쟁 현장에 보내주시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아이쿱생협의 생산자 회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회고록 <농부>를 보면 알 수 있듯, 의장님은 한국 농민운동의 역사를 살아온 거인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곁에서 지켜본 의장님의 모습이 더 그립습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고창 삼양사 소작투쟁 농민들을 만나러 가시던 모습, 서울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20살 연하인 저에게 팔씨름을 이기자 기뻐하시던 모습, 고향 집 근처에서 수확한 참두릅을 자랑하시며 천진하게 웃으시던 그 모습…. 이제 농업, 농민, 농촌 문제가 모두 해결된 평화로운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시길 빕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서옥례씨, 아들 정민·병휘씨, 딸 윤정씨가 있다. 빈소는 정읍 신태인장례식장, 발인 25일 오전 8시다. (063)571-1414.
이선형/순창군농민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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