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좋은 세상 꼭 보자던 오랜 친구 홍창의에게
전화를 했더구나. ‘오늘 주제는 뭘까?’ 생각했지. 촛불시위, 세월호,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이런 문제를 놓고 너는 내 생각을 묻곤 했으니까. 그런데 “태호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어머니더군. 5일 오전, 네가 숨졌다는 벼락같은 통보. 순간 네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고민하다 얻은 몹쓸 병과 싸우며 보냈을 지난 20여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군.
검은 뿔테 안경의 너는 바르고 똑똑한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한 1983년. 학교에는 사복경찰이 득실댔고 민주주의와 자유의 외침에 최루탄과 곤봉이 날아오는 걸 보고 우린 너무도 충격을 받았지. 정학이나 제적, 구속, 남학생이라면 강제징집이 난무하던 시절이었어.
네가 책을 읽고 시국을 토론하던 서클에서 이번에 장례식장에 여럿이 찾아주었더구나. 네가 활동하던 민민투 기관지 <민족민주전선>에서 활동하던 동료들도 왔더구나. 너는 수배를 당하고도 ‘도바리’를 잘 쳐서 참 오래도 수배전단에 얼굴이 붙어 있었지.
1987년 10월에 결국 붙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박종철을 앗아간 바로 그곳!)에서 수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갔잖니. 그때의 ‘빵 동기’라는 어떤 이도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피를 말리는 도피 생활, 너를 찾아내라며 수사관이 집에 진을 치고 가족을 괴롭힌다는 소식, 그리고 잡힌 뒤로는 고문과 강압수사. 어마어마한 폭력과 감시로 인해 자아가 해체되는 것을 경험한 인간에게 닥칠 수밖에 없는 온갖 것들을 어찌 너라고 피할 수 있었겠니? 출소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너를 괴롭힌 그 공포와 피해의식은 그 모진 권력이 맑은 네 영혼에 가한 파렴치였다.
너 출소하고 공장에 취업해 구로 지역에서 활동했었다고 했지? 그때 함께 활동했다는 이들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많이 왔더구나. 오체투지 투쟁을 마친 지친 몸을 이끌고도 너를 보내러 온 동지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이번에 여럿 와서 제문 쓰고 제를 올렸다. 너 같은 친구 덕에 우리나라가 이만큼라도 된 것 아니냐며 한 친구가 말했고, 그렇게 너를 기억하기로 약속했다. 의사인 친구들은 네 몸에서 그토록 많은 고름이 나온 것을 알고는 그깟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한 것이 제 탓인 듯 심하게 자책하더라.
버스를 오래 탈 자신이 없어 택시를 불러 한진중공업에 내려간 적이 있다고 네가 이야기했을 때 “오! 희망 택시, 굉장한데!”라고 웃으며 대꾸했지만, 친구야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하자 걱정하고 조언해줄 때, 너무 고마웠다. 담배 끊고 건강관리 잘해서 좋은 세상 꼭 보자던 나의 친구 창의, 이제 모두 내려놓고 편하게 쉬시게나.
김태호 박종철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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