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2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은 평생 지기 강준일 선생을 보내는 마지막 인사의 글을 남겼다.
“이제 누가 있어 그 깐깐한 잔소리와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으로 우리 음악의 밭을 일구겠습니까? 참으로 허전합니다, 선생의 칠십 평생에 감사합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그의 깊은 탄식은 강준일 선생을 아는 많은 동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그의 인품과 업적을 말하기에 뭔가 ‘허전함’은 완결된 삶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오늘도 곁에서 함께 하고 있는 강준일 선생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방송광고공사 88예술단 지도위원, 올림픽 개·폐막식 음악위원, 한국민족음악인협회 의장, 제3세대 음악 동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음악원 교수.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세월이 지극히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했듯이, 그는 쉼없이 창작을 해 온 작곡가이며 여러 문화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선구적 활동을 해온 지성인이었다. 무엇보다 열정과 강인함이 넘치는 음악가로 잠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0년 전 정릉, 가까운 곳에 살던 나는 안개비가 뿌리던 어느 새벽 선생과 함께 일하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떠보니 선생은 그새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새벽 등산을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뒤따를 엄두가 나지 않아 꼼지락거리다 한마디 슬쩍 했다. “형! 오늘은 그냥 하루 쉬지, 비도 오는 것 같은데….” 그러자 마치 미리 준비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야, 작곡가는 말이야 맑은 정신, 또 그걸 받쳐주는 체력, 이 두 가지가 전부야, 그러니까 내가 산에 가지 않는 때는 연필을 놓고 작품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그 이후로 나는 농담으로도 선생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음악 공부를 하는 후배들에게 늘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쩌면 나 만이 아니라 선생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첫번째 모습일 것이다. 선생은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걷고 운동을 했다. 아침 일과는 늘 똑 같았다. 제자들이 찾아오거나 연습 지도를 할 때도 아침엔 늘 모두를 데리고 나가 함께 걷게 했다. 40여년 여름·겨울 음악캠프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아마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까지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날 점심을 함께 했던 두 제자, 박종서(동아음악콩쿠르 작곡부 1위 입상자) 목사와 정치용 한예종 교수에게는 더 기막힌 이별이 되었다.
잠깐 돌아보는 옛 이야기
1970년대 초반 을지로 6가 충신동 시장 한복판, 서울대 음대에서 대학로 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사거리 떡집 2층에 선생은 음악도들을 위한 ‘회관’을 마련해 거의 살다시피 했다. 20대 중반의 청년 강준일과 절친이자 서로 존경하는 음악가인 김무중(전 가톨릭대 음대 학장)은 늘 꿈꾸는 소년들처럼, 그러나 ‘젊잖게’ 음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악보 보관실, 회의실, 작은 오케스트라 연습실, 3~4명이 잘 수 있는 2층 침대방, 작은 피아노 연습실…, 그 시절 레슨을 해서나마 회관 운영비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생 뿐이었다. 너나 할 것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그곳은 ‘난민수용소’로 불릴만큼 가난한 음악도들의 안식처였다.
1971년 서울음악학회(Seoul Musician’s Academy)의 산실도 바로 그 회관이었다. ‘관악 음악’의 대부 격인 이재옥 선생을 지도교수로, 가장 ‘연장자’였던 스물 여섯의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서울음악학회의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음악은 숭고한 인간정신의 표현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지의 표상이다. 또한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승화시키며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이념으로 모이고 연구와 활동을 통하여 그 뜻을 넓게 펴는 동시에 서로의 헌신과 단결을 통하여, 우리 모두 나아가서는 이 사회, 민족, 국가가 음악을 통한 영원한 세계로 발전할 것을 바라고 또 믿는 것이다.”
이십대 청년들의 진정성 있는, 힘 있는 외침은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예술 활동의 정신적 지침이 되고 있다.
서울음악학회의 여름·겨울 음악캠프는 어느덧 100회에 이르고 있다. 맨처음 원주 가톨릭 기숙사부터 수원 크리스찬 아카데미, 춘천 소양예술농원 등등 전국을 돌며 면면히 이어왔다. 특히 원주는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등 재야 운동 대부들의 격려와 후원 아래 지휘자 임헌정과 정치용, 작곡가 박종서 등 여러 음악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여름 캠프 때면 주교관 정원에서 강 선생이 편곡한 ‘선구자’를 들으며 가만이 바라보던 지학순 주교의 모습은 음악캠프 초기 10년의 대표적인 풍경으로 남아 있다. 캠프에 참가한 음악회 회원들이 장일순 선생의 형제이기도 한 장화순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진광고를 방문해 악기를 점검해주고, 관악기 리드를 깎아주고, 연습을 시켜 사실상 밴드부를 만들어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인 오광호 선생과 그의 절친이며 역시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이기도 했던 선생의 친행동 고 강준혁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 수백명의 서울음악학회의 출신 음악가들이 각 분야에서 왕성항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늘 선생이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강준일 선생의 활동과 생각의 폭과 깊이를 몇 줄 글로 다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저 오래 전부터 해온 몇 가지 활동을 살펴서 각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73년 선생은 요즈음의 ‘영상이 있는 음악’ 의 원조격인 <동양방송>의 ‘노래의 날개 위에’ 프로그램을 위해 편곡·앙상블팀 지도·운영을 맡아 7년간 진행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성악가들이 출연했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전자 복사기도, 미디어 장치도 없던 시절이라 필사본으로 그려서 검보하고 연습하고 연주를 해내야 했다. 선생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녹화할 때 지휘까지 맡았다.
연주단들은 악기 운반은 물론이고,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무쇠 재질의 보면대가 너무 무거워 힘들었지만 기꺼이 즐겁게 나르곤 했다. 그때 함께 수고해준 후배, 동료, 선배 음악가들에게 선생의 마음을 담아 새삼 감사드린다.
75년에는 중앙국립극장에서 송수남 교수의 창작무용극 <무영탑>을 국내 처음으로 100명의 오케스트라 반주로 공연했다. 지금은 상상이 잘 되지 않겠지만 밤샘 연습을 위하여 연주자들의 부모들에게 일일이 손 편지를 적어 보내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제번하옵고…이러한 뜻 깊은 작업에 귀댁의 자녀분을 보내주셔서 아름다운 예술이 피어날 수 있도록….” 가장 단정한 글씨체를 지녔던 김무중 교수가 많이 애쓰셨다.
77년 한국적 문화기획자 1호인 고 강준혁이 김수근 교수의 공간사랑에서 일하게 되면서 선생은 김덕수 사물놀이패 창단을 비롯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유하게 된다. 무용, 연극, 현대음악, 시 낭송 등 전 분야의 예술가들과 만났는데 특히 선생은 작곡가로 열 마당 열 두 거리,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 만가 전 6곡 등 창작 무용음악의 기초를 닦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는 <일간스포츠> 문화부 기자이자 훗날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을 지낸 구히서 선생이 늘 함께 하며 대본 구성을 비롯해 다양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95년 유엔 창립 50돌 기념으로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에서 정명훈이 지휘한 ‘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마당’은 큰 감동을 주어 97년 서울시교향악단의 베이징 공연 때 연주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농악장단에 기초한 ‘마당’과 함께 무속장단을 기초로 한 협주곡 ‘푸리’도 같이 준비되고 연주되었다.
늘 함께 해온 후배들을 빼고는, 선생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정교하게 구성된, 구조 하나하나에 의미를 둔 ‘이성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좀 어려워도 ‘역시 강준일 선생 작품이군’ 하고 알 수 있다. 선생도 한때는 열혈청년의 감성과 강렬한 드라마를 품고 있었다. 20대 시절 만든 피아노 소품들을 들어보면 아, 하는 소리가 나올만큼 서정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 선생의 작품이 맞는지 다시 살펴볼 정도다.
선생의 저서나 강좌 역시 작품만큼이나 ‘어느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다. 최근의 강의 제목 만이라도 살펴봐도, 문화와 문명의 시작, 슈펭글러의 문화 순환론, 파우스트적 종말론, 현 시점에 대한 반성, 문화와 공동체의식, 전통문화와 세계화, 새로운 시대-순수예술, 음양삼재의 마법, 시대적 각성과 전환의 시점, 명상적 보잉 기초 연습법, 우리의 음악, 서양음악문화사 비판, 음악에로의 입문, 강준일 교수의 화성학 연습 등등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간략하게 살펴본 선생의 강좌는, 생각은, 또 마음은, 늘 불확정적인, 열린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과연 당신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세가 되어 있는가? 진정 예술을 사랑한다면 보다 더 높은 의식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 여주 작업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선생은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마당’, ‘푸리’ 말고도 금관악기와 사물의 ‘판굿’, 현악과 함께하는 ‘살풀이’,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모음곡 ‘풍물굿 한 마당’, 관악합주와 사물을 위한 ‘팡파레’, 관현악과 북을 위한 ‘북소리’, 현악합주와 징을 위한 ‘옛 이야기’ ,실내악곡 ‘플룻과 호른, 현을 위한 앙상블’ 외 13편, 국악 관현악과 소리를 위한 가곡, 독주 비올라를 위한 조곡, 김철호·이건용과의 공동 작업 ‘노래극 우리들의 사랑’, 김영재 명인과 함께한 총체무용극 ‘새 불’ 등이다.
85년 시작된 종합예술무대 <울타리굿>은 산울림극장 개관기념으로 첫 공연을 한 이래 87년 국토통일원이 주최한 ‘통일굿’으로 임진각에서, 2000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주간 초청작품으로 선정됐다. 강준혁 감독·강영걸 연출·강태환 강준일 음악으로 프랑스 부르봉 절벽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를 통한 ‘개념의 폭’과 ‘확장 가능성’은 진정한 한국문화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선생의 우리 가곡에 대한 관심도 각별했다. 83년부터 전주의 작곡가 김광순 교수와 함께 매년 창작가곡 발표회 ‘겨울나무’ ‘바람소리’를 통해 100여곡의 신작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이 특별한 것은 그의 가곡 악보 첫 페이지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즉 ‘벗 김무중을 위하여’, ’벗 남의천을 위하여’, ‘소프라노 김경희의 소리타래…’와 같이 시와 노래하는 사람의 음색, 분위기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한 번 부른 성악가들이 지속적인 레퍼토리로 삼게 했다. 미국 영아티스트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이보연을 비롯해 선생의 작품을 받은 연주자도 여럿 있다. 독일에서는 선생의 작품만으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고 올 6월 유럽 순회연주도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또 우리는 일찌기 이런 예술가를 보지 못했다. 1주일에 2~3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전통원에서 이론 강의부터 스터디 그룹 지도까지 했다. 전통원의 정수년 교수는 “우리 전통원 해금반 반장님이셔요” 라고 늘 선생을 소개할 정도였다. 지난해 금호아트홀에서 공연한 해금 오케스트라는 굉장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또 2~3일은 여주 작업실에서 작품을 창작하고, 밤이면 서울음악학회 앙상블팀·작곡팀·피아노팀을 지도했다. 젊은 그의 제자들은 새벽까지 연습하고 토론하다 동이 틀 때 잠이 들었지만,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책을 다녀와 제자들을 위한 식탁을 준비한 스승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작곡 유학 중 잠시 들어왔던 선생의 둘째딸 지연은 “예전의 반성회, 평가회는 피바다였는데...” 하며 웃었다. 젊은 시절부터 필요한 살림을 안팍으로 이끌어갔던 선생의 성실한 삶은 지금까지도 음악가로서, 교육자로서, 선배로서, 인생의 멘토로서, 때로 아버지로서 모두의 가슴에 별처럼 새겨져 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허전하다, 참으로 허전하다, 허전하고 허전하고 또 허전하다.” 그럼에도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며칠 뒤 예정된 앙상블연주회를 위해 어린 제자들은 오늘도 선생의 여주 작업실에서 밤마다 모여 여느 때처럼 연습을 계속할 것이다. 깐깐한 잔소리가 아니라 가까운 제자들이라 더 힘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매서운 질책은 더 이상 없어도, 그들의 마음은 따뜻하고 또 든든했다. 그들을 지켜주는 큰 선생님이 늘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강준일 선생이 남겨주신 선물이다.
하영일/안동문화예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