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준희 변호사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1세대 인권변호사’의 대표 인물이었다. 사진은 1985년 12월 문익환(뒷줄 오른쪽 넷째) 선생의 부친 문재린 목사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뒷줄 맨 왼쪽 조영래, 한 사람 건너 이돈명, 맨 오른쪽 유현석 변호사, 앞줄 왼쪽 둘째부터 홍성우·조준희·황인철 변호사. <한겨레> 자료사진
[가신이의 발자취] 조준희 선배님을 그리며
깊은 슬픔입니다. 여러 달 전에 고치기 힘든 병환을 얻어 병세 짙은 선배님의 얼굴을 뵈었고, 얼마 전부터는 상태가 위중하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지만, 부음은 여전히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입니다.
30년 전 이 땅이 독재에 신음하고 있을 때 새내기 변호사로 산처럼 높은 선배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재판정마저 아니 재판정이어서 더욱 저항하는 몸부림이 서슬 퍼런 권력과 부딪히는 현장에서 선배 변호사님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울타리이고 위로였습니다.
선배님은 권력의 부당한 사법개입이 본격화되던 1970년대 초 판사직을 그만둔 뒤 양심수들의 변호인으로 한결같이 활동하셨습니다. 한없이 어두웠던 시대, 그 모습만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부당한 권력이 곧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의연함은 심판받을 대상이 피고인석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는 도덕적 확신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변함없이 평범해 보이는 그 모습 자체가 ‘후세의 위엄’이었습니다.
선배님과의 공동 변론을 통해, 의지만 앞서던 후배들은 법 지식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중한 균형 감각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모래알 같은 법조문화에서, 정법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대표간사를 맡아 변호사의 사회적 기여에 획을 긋는 모범을 만들고 끊어지지 않는 흐름으로 정착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중요한 몫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선배님은 자신을 먼저 드러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배님께 빚진 것을 그만 열거하겠습니다. 선배님을 보내드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차마 보낸다는 말씀을 드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그리움이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물 흐르듯 넘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과 정체로 이어지는 지금 이 사회의 모습이 선배님을 떠나보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 짐을 선배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후배들이 넘겨받고자 합니다. 깊어진 병환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모습을 후배들 마음속의 다짐으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선배님의 기치 아래 50여명이 시작한 민변이 어느덧 1천명이 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에 대한 소중한 기억은 후배들의 마음에 남아 새로운 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걱정은 접으시고 부디 영면하소서.
백승헌/전 민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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