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3묘역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에서 봉분 위에 잔디를 덮는 묘역 단장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가신이의 발자취] ‘와이에스와 재야 가교’ 김정남 전 수석이 쓴 추모글
당신의 살아생전에 저는 거산(巨山)이라는 당신의 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고장 거제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유치하고 너무 거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당신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사 당신이 거산이었던 것을 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당신은 진정 이 나라 민주화의 큰 산이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차마 미워할 수 없는 분
실명제 담화문땐 ‘경제수석도 모른다’ 철통 보안 당부 이제 6년의 시차를 두고 김대중·김영삼 두 대통령이 가시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신화는 사라지고, 이 나라 민주주의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이 막막한 허허로움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지도자란 그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막혀 있으면 그 막힌 것을 뚫어주고,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 장애를 치워주며,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뿌리쳐주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앞장서 가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민주화의 역정에서 와이에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 라만차의 영웅처럼 때로 당신은 무모할 만큼 엉뚱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유신의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쳐 국민과 동지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고, 전두환 군부독재에는 생명을 건 단식투쟁으로 민주화를 향한 길을 냈습니다. 은둔의 대상으로만 알았던 산을 민주화 투쟁의 튼튼한 진지로 만들었으며, 동토의 땅에서 2·12 총선 신화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1천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마침내 6·29선언과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습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하룻밤 사이 50개의 별을 떨어뜨린 하나회 척결로 다시는 이 땅에 정치적 밤이 없게 했습니다.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우리 공동체의 치명적 장애를 제거하였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성공한 쿠데타라는 12·12와 5·17을 단죄함으로써,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웠습니다. 금융실명제의 전격적 실시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늪에서 끌어냈습니다. 유신 말기 의원직을 제명당했을 때는 잠시 살기 위하여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기보다는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노라 의연했습니다. 과연 당신은 대도무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김영삼 대통령,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1993년 2월25일의 문민정부 출범은 1948년 8월15일의 정부 수립에 버금가는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한국인을 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취임 후 첫 중국 방문 때 저는 인민대회당에 마중 나온 중국 각료들의 눈에서 한국, 한국인에 대한 존경과 찬탄과 부러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한류가 싹트기 시작한 것도, 문민정부의 수립, 곧 한국의 민주화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임기 중 지방자치를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결한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으로 독대한 것은 1975년 연초,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일로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이후 저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종교계 등 재야와 신민당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고, 때로는 당신의 연설문이나 저서를 대필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먼저 나오고, 1984년 국내 일월서각에서 나온 <나와 내 조국의 진실>은 그 내용, 한 편 한 편이 상도동과 저 사이를 오가며 작성되었습니다. 1983년 단식투쟁 때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과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의 초안은 물론 완성된 성명서까지 이돈명 변호사의 제일합동법률사무소에서 타자복사까지 해서 김덕룡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나는 이번 단식투쟁에서 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는 구절을 쓸 때 울컥했던 기억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단식이 끝나고 얼마 뒤, 구속된 김덕룡의 반포동 아파트에서 단식으로 초췌해진 당신을 만났을 때는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제14대 대통령 취임사를 내 손으로 썼다는 사실입니다. 토론을 통해 방향과 대강을 정하고, 당신의 말투와 억양에 맞게 고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그것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 저였습니다. 22분에 걸쳐 낭독된 취임사는 역대 어느 누구의 취임사보다도 간결하고 또 훌륭하다고 저는 지금도 자부하고 있습니다. 취임사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하지요.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1993년 8월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신이 불러 올라갔더니, ‘금융실명제와 관련한 긴급재정명령권’안과 담화문 초안을 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써온 담화문이 너무 구투라서 못 쓰겠으니 완전히 새로 써줄 것을 제게 부탁하시면서 경제수석도 모르는 일이니 비밀엄수를 재삼재사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제가 다시 쓴 담화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퇴임 후 더 자주 저를 부르셨습니다. 해외에 나가거나 국내에서 행할 연설 원고를 꼭 불러서 점심을 주시면서 부탁하셨지요. 제가 나이 들어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더러 쓰게 하시라고 해도 굳이 제게 “나는 김 수석 글이 제일 좋아!” 하시면서 제게 그 일을 계속 떠맡기곤 하셨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에 즈음한 러시아 방문에 수행한 것도, 그때 당신의 연설원고를 쓴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술이 생기면 그것은 영락없이 제 차지가 되곤 했지요. 당신은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셨습니다. 날마다 마산에 계신 아버님께 전화하시는 것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조깅을 빼놓지 않으신 것, 칼같이 시간을 엄수하는 것, 모임에 참석하면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는 것, 소소하지만 저희들이 꼭 배우고 본받아야 할 덕목인 줄 압니다.
남에게는 어떻게 비쳐졌는지 모르지만 제게 당신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차마 미워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쌓인 회포와 사연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있었던 미움과 갈등, 모두 잊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 이루소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실명제 담화문땐 ‘경제수석도 모른다’ 철통 보안 당부 이제 6년의 시차를 두고 김대중·김영삼 두 대통령이 가시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신화는 사라지고, 이 나라 민주주의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이 막막한 허허로움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지도자란 그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막혀 있으면 그 막힌 것을 뚫어주고,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 장애를 치워주며,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뿌리쳐주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앞장서 가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민주화의 역정에서 와이에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 라만차의 영웅처럼 때로 당신은 무모할 만큼 엉뚱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유신의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쳐 국민과 동지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고, 전두환 군부독재에는 생명을 건 단식투쟁으로 민주화를 향한 길을 냈습니다. 은둔의 대상으로만 알았던 산을 민주화 투쟁의 튼튼한 진지로 만들었으며, 동토의 땅에서 2·12 총선 신화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1천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마침내 6·29선언과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습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하룻밤 사이 50개의 별을 떨어뜨린 하나회 척결로 다시는 이 땅에 정치적 밤이 없게 했습니다.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우리 공동체의 치명적 장애를 제거하였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성공한 쿠데타라는 12·12와 5·17을 단죄함으로써,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웠습니다. 금융실명제의 전격적 실시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늪에서 끌어냈습니다. 유신 말기 의원직을 제명당했을 때는 잠시 살기 위하여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기보다는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노라 의연했습니다. 과연 당신은 대도무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김영삼 대통령,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1993년 2월25일의 문민정부 출범은 1948년 8월15일의 정부 수립에 버금가는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한국인을 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취임 후 첫 중국 방문 때 저는 인민대회당에 마중 나온 중국 각료들의 눈에서 한국, 한국인에 대한 존경과 찬탄과 부러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한류가 싹트기 시작한 것도, 문민정부의 수립, 곧 한국의 민주화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임기 중 지방자치를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결한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으로 독대한 것은 1975년 연초,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일로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이후 저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종교계 등 재야와 신민당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고, 때로는 당신의 연설문이나 저서를 대필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먼저 나오고, 1984년 국내 일월서각에서 나온 <나와 내 조국의 진실>은 그 내용, 한 편 한 편이 상도동과 저 사이를 오가며 작성되었습니다. 1983년 단식투쟁 때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과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의 초안은 물론 완성된 성명서까지 이돈명 변호사의 제일합동법률사무소에서 타자복사까지 해서 김덕룡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나는 이번 단식투쟁에서 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는 구절을 쓸 때 울컥했던 기억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단식이 끝나고 얼마 뒤, 구속된 김덕룡의 반포동 아파트에서 단식으로 초췌해진 당신을 만났을 때는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제14대 대통령 취임사를 내 손으로 썼다는 사실입니다. 토론을 통해 방향과 대강을 정하고, 당신의 말투와 억양에 맞게 고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그것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 저였습니다. 22분에 걸쳐 낭독된 취임사는 역대 어느 누구의 취임사보다도 간결하고 또 훌륭하다고 저는 지금도 자부하고 있습니다. 취임사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하지요.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1993년 8월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신이 불러 올라갔더니, ‘금융실명제와 관련한 긴급재정명령권’안과 담화문 초안을 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써온 담화문이 너무 구투라서 못 쓰겠으니 완전히 새로 써줄 것을 제게 부탁하시면서 경제수석도 모르는 일이니 비밀엄수를 재삼재사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제가 다시 쓴 담화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퇴임 후 더 자주 저를 부르셨습니다. 해외에 나가거나 국내에서 행할 연설 원고를 꼭 불러서 점심을 주시면서 부탁하셨지요. 제가 나이 들어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더러 쓰게 하시라고 해도 굳이 제게 “나는 김 수석 글이 제일 좋아!” 하시면서 제게 그 일을 계속 떠맡기곤 하셨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에 즈음한 러시아 방문에 수행한 것도, 그때 당신의 연설원고를 쓴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술이 생기면 그것은 영락없이 제 차지가 되곤 했지요. 당신은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셨습니다. 날마다 마산에 계신 아버님께 전화하시는 것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조깅을 빼놓지 않으신 것, 칼같이 시간을 엄수하는 것, 모임에 참석하면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는 것, 소소하지만 저희들이 꼭 배우고 본받아야 할 덕목인 줄 압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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