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아름다운 배우’ 백성희 선생님 영전에
‘아름다운 배우’ 백성희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 백성희 선생님! 지금 여기는 백성희장민호극장입니다. 장민호 선생님 떠나시고, 선생님마저 떠나셨으니 이 극장은 이제 전설의 극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우리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선생님을 떠나보내는 이 슬픈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그 자리에 계심으로 귀감이 되고 또 위로가 되었던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직은 믿겨지지 않습니다만, 선생님은 가장 행복한 배우셨기에 슬픔으로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선생님은 명실공히 한국 연극의 기둥이셨습니다. 전쟁과 한국 근대사의 온갖 풍파를 거치면서도 70여년간 연극의 끈을 이어오신 대한민국 연극사의 주춧돌이며 산증인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과 한 무대에서 연극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영광이었고, 연극하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하는 성실함으로 배우의 귀감을 보여주셨고, 선생님의 연기는 우리들의 모범이었고, 교범이었고, 전범이셨습니다. 또한 국립극단 단장으로 일하시면서 배우들의 권익과 연극환경 개선에도 힘을 다하시며, 창단 이래 지금까지 국립극단의 단원으로서 든든한 버팀목이자 동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는 인자한 어머니와 같았지만 또한 강하고 당당한 배우였습니다. 고령에도 고운 화장과 단정한 옷매무새를 갖추고 흐트러짐 없이 연습장으로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항상 후배들의 연극하는 자세를 새롭게 다짐하게 하셨습니다.
백성희장민호극장을 개관하면서 두 분께 헌정하는 공연 <3월의 눈>을 만들고, 두 분이 직접 연기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제 생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선생님은 관객의 마음을 보듬듯 위로하고, 우리의 부박한 삶을 어루만지는 연기예술의 정점을 보여주셨지요. 선생님께서 맡으신 ‘이순’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남편이 힘들고 연약해지는 순간마다 햇살 같은 미소로 용기를 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무대 위에서 흥얼거리시던 노랫가락이 귓가에 아직 선합니다. ‘이순’의 대사가 들리는 듯 생생합니다.
“이 사람아, 왜 여기 이러구 있어…. 집은 오래 비워두면 안 되는 거야. 비워줄 땐 비워주더래두 돌아가야지, 그만 돌아와야지. 아이구, 이 착한 사람아, 자네 넋은 어디 두고 몸만 남았는가. 나는 집을 잃었고 자네는 집만 남았는가 그래, 거기서라두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거들랑 자다 일어난 듯 돌아오게, 꿈에서 깬 듯이 돌아가게.”
오늘 선생님과 함께 봄날은 벌써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장민호 선생님께서 반갑게 손을 잡아주시고 새로운 연습장으로 안내를 하시겠지요. 비록 선생님의 육신은 이승을 떠나지만, 선생님과 함께했던 추억과 역사는 이곳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계절이 되면 내리는 눈처럼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를, 무대를, 한국 연극을 지켜봐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름다운 배우 백성희 선생님! 부디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손진책/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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