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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당신의 디자인을 바라보면 일상범백사가 맑아지더이다

등록 2017-05-01 21:35수정 2017-05-01 22:04

【가신이의 발자취】 1세대 북디자이너 최만수 선생 영전에
2015년 7월 장석주(왼쪽) 시인의 <일요일의 인문학> 표지 작업을 끝내고 함께 자리한 최만수(오른쪽) 디자이너.
2015년 7월 장석주(왼쪽) 시인의 <일요일의 인문학> 표지 작업을 끝내고 함께 자리한 최만수(오른쪽) 디자이너.

북디자이너 최만수(1955~2017·끄레 어소시에이츠 대표) 선생이 지난달 26일 정오 영면했다. 향년 62. 몇 달 전 한 자리에서 밥 먹으며 재담 넘치는 얘기에 웃음보를 터뜨렸는데, 죽음이라니! 이르고 갑작스런 그이의 죽음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부음을 받은 그날 오후내내 마음이 황망해져 일손을 놓고 만다. 모란과 작약 꽃들이 피고 버드나무 가지마다 초록은 짙어오는데, 오래 사귄 한 벗과의 이별로 생동하는 봄날 빛과 소리의 화사함이 시들해지고, 세월의 얄궂음이 부리는 지독한 심술에 내 보람과 기쁨들 역시 찬연함을 잃어 보잘 것 없어져버린 탓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이에게 더는 죽음이 없으리라는 점이다. 존 던은 이렇게 노래한다. “한 짧은 잠이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 더는 죽음이 없으니, 죽음이여, 그대는 죽을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여, 더는 죽은 자 앞에서 뻐기지 말라!

최만수 선생은 잠시 판화가를 꿈꾸다 1982년 디자인회사 ‘이가솜씨’를 거쳐 85년 ‘끄레’를 세우고 이끌며 평생을 북디자이너로 살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납 활자 인쇄시대에서 옵셋 인쇄, 즉 평판 인쇄 시대로 넘어오는 변화의 시대에 그이는 정병규·안상수·서기흔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북디자인의 씨앗을 심고 가꾸며 새 길을 연 제1세대 북디자이너다. 국수 잘 하는 솜씨가 수제비 못 하랴! 그이의 손길이 가 닿으면 형태 없던 것들이 돌연 형태를 얻고, 볼품없는 것들은 볼품을 얻어 살아났다. 그이는 다 챙겨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빼어난 광고들과, 월간 <해인>, 부정기 간행물 <딧새집>, 이철수 판화달력, 민병헌 사진달력, 주명덕 사진집, 이론과실천, 현암사, 삼인출판사, 호미 등에서 아름답고 기억에 남을만한 책표지를 만들었다.

서른 해 전쯤 나의 첫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표지 장정을 그이가 맡은 인연으로 오래 만나고 사귀었는데, 늘 그이의 안목과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인품의 깊이에 감화를 받았다. 그이는 알곡이고 나는 쭉정이였다. 그이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또렷하고 취향이 고매하며, 성정은 유쾌하고 인격은 담백했다. 그이의 사람됨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과 난잡한 것을 가려내는 밝은 눈과 재바른 손으로 범박한 것에 생동을 불어넣는 디자인 솜씨를 흠모했다. 그이는 늘 복잡함과 잡다함을 버리고 단순함을 취하는데, 그 디자인의 바탕 정신은 미니멀리즘, 혹은 중용의 미학이다. 늘 빼고 덜어 낼만한 것이 없을만큼 선과 색의 최소주의에 충실하고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을 늠름하게 고집하는 디자인은 눈으로 보는 음악이며, 귀로 듣는 그림이었다. 그이의 고집과 솜씨가 드러난 디자인을 보고 있자면 일상범백사가 고요함과 단순함 속에서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피었던 꽃은 지고, 타올랐던 것은 재로 변하며, 온 것은 반드시 돌아간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소명이요, 자연의 변함없는 섭리다. 이것에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다. 아,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도 모란과 작약 꽃이 피고, 푸른 강들이 흐르는가? 이른 죽음에 황망하고 빠른 이별이 섭섭했지만, 최만수 선생, 이제 이승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죽고 사는 일의 덧없음 없는 곳에서 부디 불멸의 평안을 세세토록 누리소서!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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