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급성 폐렴으로 별세한 배우 윤소정씨가 영정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1983년 초연 때 한국 연극사장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운 연극 <신의 아그네스>(연출 윤호진) 주역들. 왼쪽부터 고 윤소정·윤석화·이정희씨.
1999년 앙코르 공연을 위해 13년만에 다시 뭉친 <신의 아그네스>의 주역들. 왼쪽부터 윤석화·고 윤소정·이정희씨. <한겨레> 자료사진
1983년. 무대를 가득 채운 자욱한 담배 ‘럭키 스트라이크’의 연기 속에서 냉철한 지성으로 진실을 파헤쳐 나가던 닥터 리빙스턴. 제가 실험극장의 연출가로 있을 때, <신의 아그네스>란 작품에서 연출과 배우로 만난 고 윤소정은 지성적이고 냉철한 역할에 관한 한 따라올 배우가 없을 정도로 특별한 재능을 지닌 배우였습니다. 당시에 드물었던 10개월의 장기공연으로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신의 아그네스>에서 고인이 보여줬던 ‘닥터 리빙스턴’의 연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연극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니, 고인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인은 특별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항상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많은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배역을 분석하고, 무대에 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연습을 했습니다. 매회 공연이 마치 첫 공연인 듯 긴장하고 몰입하던 고인의 모습,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에도 늘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던 고인의 모습은 저뿐만 아니라 함께 연기를 했던 배우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습니다.
1991년에 <실비명>이라는 작품에서 다시 만난 고인은 세월의 흐름만큼 한층 더 깊어진 매력으로 제가 기대한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고인이 맡은 역할의 비중을 늘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본 공연이 끝난 뒤 하차하게 된 고인과 지방공연까지 함께하고 싶어 세 번이나 찾아가 부탁할 정도로, 고인은 연출가로서 제가 늘 함께 작품을 하고 싶은 소중한 배우였습니다.
지난 2일 골프를 함께 친 뒤 찍은 고 윤소정씨의 마지막 사진. 가수 남궁옥분씨가 17일 에스앤에스를 통해 공개했다.
불과 한 달 전, 연극인들의 모임에서 만난 고인은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인이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비보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직 보여줄 게 더 많은, 후배들에게 늘 귀감이 되어주던 존경스러운 배우 한 명이 또 세상을 떠났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고인을 추억하며, <신의 아그네스>에 나온 닥터 리빙스턴의 첫 대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해피엔딩! 그건 당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것을 추구하며, 또한 얼마나 절실하게 그것을 필요로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늘 무대를 절실하게 생각하고, 무대 위에서는 철저한 완성을 추구했던 배우 고 윤소정. 과연 연기 인생에서 자신만의 연기 스타일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있을 수 있을까요. 고인이 자신만의 매력과 스타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무대 위의 순간들은 오랫동안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윤호진/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