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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날벼락처럼 가셨지만 현장 ‘카메라 아이’ 끄지 않을게요”

등록 2020-01-28 19:40수정 2022-03-17 12:10

[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강길 다큐멘터리 감독님 영전에
지난 15일 전주에서 열린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상영회 때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진행자 황윤(오른쪽) 감독과 함께한 이강길(왼쪽) 감독.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사진 황윤 감독 제공
지난 15일 전주에서 열린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상영회 때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진행자 황윤(오른쪽) 감독과 함께한 이강길(왼쪽) 감독.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사진 황윤 감독 제공

‘이강길 감독 1월25일 별세, 향년 53’. 강길형….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입니까. 불과 열흘 전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상영회에서 형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은 그때, 이번 감기가 독해서 오래 간다며…, 다음날은 순천에서 환생교(환경과 생명을 생각하는 교사 모임)와 함께 영화 상영이 있어 내려가기로 했다며…, 다음 작업이랑 독립 다큐 배급에 대해…,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맥주도 한 잔 했는데…, 급성 백혈병으로 입원 나흘만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길형은 언제나 약자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고교를 마치고 일본영화학교에서 다양한 영상의 세계를 경험한 형은 1990년대 후반 ‘푸른영상’ 을 찾아가 다큐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창 새만금 간척을 막고자 싸우고 있는 주민들의 활동을 기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3개월 예정으로 달려간 현장에서 10년을 함께 했습니다. 2007년 서울국제환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2008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상 환경예술부문 대상 등을 잇따라 받으며 ‘환경 다큐 감독’으로 불리우게 됐지만, 정작 형은 환경 다큐라기보다는 “생존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내몰리는 갯벌 사람들, 핵 폐기장으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을 위기에 처해 있던 부안 섬사람들, 케이블카 사업으로 벼랑 끝으로 몰린 설악산과 산양…, 형의 카메라는 늘 삶터에서 내쫓기는 여리고 소중한 생명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모두가 떠날 때, 형의 카메라는 그곳에 머물러 기록했고, 가장 슬프고 억울한 자들의 곁에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마지막까지 전하는 ‘최후의 스피커’가 되고자 했습니다.

강길형의 별명은 ‘카메라를 든 어부’였습니다. 강길형은 누군가를 피사체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아예 동지가 되고, 동생이 되고, 형이 되고, 아들이 되고, 삼촌이 되어,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살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길형은 어디를 가든 현지인으로 오해받을 정도였습니다. 외모뿐 아니라, 그 우직하고 순박한 마음 하나로 형은 현지인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에도 혹한에도. 강길형은 늘 현장에 있었습니다. 형의 이메일 아이디는 ‘카메라 아이’(camera eye), 독립 다큐 제작사 이름도 ‘카메라 아이’. 현장을 지키는 눈,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짓밟히던 사람들의 편에서, 국책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는 공동체 한 가운데서, 가장 춥고 어두운 그늘에서, 그 어두운 그늘에도 사람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천직으로 알았던 강길형. 살림살이는 가난했지만, 가방은 늘 무거웠습니다. 촬영 장비만도 무거운데, 현장의 동지들 먹일 간식으로 가득 차 있던 형의 배낭. 동료, 후배 감독들이 우는 소리 하며 촬영을 부탁할 때도 언제나 무조건 달려와 주던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15일 전주영화제작소 주최로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2019전주국제영화제 개봉작 &lt;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gt; 상영회에서 고 이강길(오른쪽) 감독이 필자 황윤(왼쪽) 감독 진행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 황윤 감독 제공
지난 15일 전주영화제작소 주최로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2019전주국제영화제 개봉작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상영회에서 고 이강길(오른쪽) 감독이 필자 황윤(왼쪽) 감독 진행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 황윤 감독 제공

지난 15일. 마지막 상영회일 줄 꿈에도 몰랐던, 전주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 가운데 형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욕이 섞인, 특유의 투덜이 스머프 같은 말투로….

“예전에 제가 술을 엄청나게 먹고 문정현 신부님한테 전화해서 막 그랬어요. 종교인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이 새만금도 하나 못 막느냐, 그러니까 신부님이 가만히 한참 듣고 계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 70살이 다 됐는데 내가 여태까지 이겨본 싸움이 없는 거 같다. 근데 너 지금 반 백 살 살았는데 뭐 이기기를 바라냐? 근데... 근데 말이다. 가만히 보니까, 봉건제도가 안 무너질 것 같은데 무너지더라. 일제가 영원히 집권해서 한반도를 먹을 줄 알았는데 걔들이 패망하고 물러가더라. 유신독재가 안 무너질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무너져 있더라. 군사독재가... 정말 군홧발로 짓이기고 굉장히 엄혹했는데...뒤돌아보니까 그 독재도 무너져 내렸더라.’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중략) 그래서 저는 그런 거 같아요. 각자가 자기 일을 묵묵하게 하고 있을 때, 그럼 비로소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것들이 오지 않을까? 단지 그게 빨리 오느냐 늦게 오느냐에 따른 그 차이점이고, 당장 내 앞에서 안 오기 때문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는 거 같아요.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 계속해서 해야죠. 그게 제 방법인 거 같아요.”

그날 감독님의 이 말씀을 들은 관객들과 저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에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길형, 이제는 무거운 장비, 무거운 배낭, 그리고 무거웠던 책임감과 사명감,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형이 못다 한 이야기들은 저희들이 이어 갈게요. 형이 꿈꾸던 생명과 평화의 세상, 저희가 꼭 만들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할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먼저 간 박종필 선배 만나 술 한 잔 하시고, 먼저 간 계화도 류기화 이모랑도 한 잔 하시고….

강길형, 고생 많았어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기록과 소중한 영화들을 이 세상에 남겨주어 고마워요. 나누어주신 따뜻한 마음도 감사했어요. 편히 쉬세요.

황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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